東西古今

정자문화의 고장/담양 강진

뚜르(Tours) 2010. 4. 21. 09:23

免有地(면유지)                     내려다 보면 땅이요
仰有天(앙유천)                        올려다 보면 하늘이네.
亭基中(정기중)                        그 가운데 정자를 지으니
興浩然(흥호연)                        호연지기 일으나네.
招風月(초풍월)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揖山川(읍산천)                        산과 냇물도 끌어 들이네.
扶藜杖(부려장)                        명아주 지팡이 짚고서
送百年(송백년)                        한 백년 살고 싶어라.


면앙정 송순이 지은 삼언시三言詩다.
송순은 송강 정철의 스승이다.
송순의 또 다른 시조 한 수를 읊어보자.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은 90세까지 장수하며 천수를 누렸는데 이는 가난한 삶에서도 만족할 줄 알며 즐겁게 살아가는 옛선비들의 안빈낙도의 삶이 그 바탕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면앙정(人免仰亭)은 담양 남쪽 제월봉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정자 이름이다.
면앙정에 앉아서 건너다 보면 드넓은 담양 평야 저 너머로 병풍산이 병풍을 두른 듯 누워 있다.
면앙정은 앞과 뒤 좌우에 마루를 만들고 마루 중앙에 방을 배치한 구조가 특별하다.
담양은 정자가 많은 곳이다.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정자가 있다.

 

작년 서울대 경영대학 DMP3기가  안동지역으로 퇴계 이황과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역사와 문학 기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석도정 사장이 ’이번에 우리가 안동 와서 서원문화를 접했으니 다음번엔 정자문화를 한 번 둘러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모두들 박수로 찬동을 했고 그래서 이번에 정자문화의 고장 <담양과 강진>을 찾았다.
우리 DMP3기는 1년에 봄 가을로 부부 동반하여 <문학과 역사 기행>을 하고 있다.
김경식 시인은 ’자기가 역사와 문학 기행을 지금까지 칠백수십회를 해오고 있는데 이렇게 부부동반으로 하는 팀은 흔치 않다’고 한다.
이응직사장 유민자시인 부부의  제안으로 문학기행을 시작했는데 김경식 시인을 모시고
1차로 감자꽃 시인 권태응의 고향 충북 괴산과 충주를 돌아봤고
2번째 기행으로 퇴계 이황과 이육사 시인의 고장 경북 안동을 작년 가을에 다녀온 바 있다.

 

앞으로 돌아가자.
송순은 후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항상 자신의 수양에 힘 쓰고 타인을 편안하게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살았다.
한성부 판윤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으로 은퇴를 했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그 당시는 사화와 당쟁으로 몹시도 어지럽고  험난했던 세월의 연속이었는데
그의 벼슬길이 순탄했고 장수를 한 비결은 너그럽고 후덕한 그의 성품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들 둘의 이름을 해관海寬 해용海容으로 붙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
두 아들의 이름 끝자를 합치면 관용寬容이 된다.
정자의 이름을 짓는데도 그의 고매한 인품과 사상이 녹아있다.
면앙정(人免仰亭)의 면(人免)은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앙仰은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결국 면앙정은 ’겸손하게 땅을 바라보며 하늘을 우러러 보는 집’이다.
송순의 삶의 일관된 태도는 관용이었고 그것은 그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담양은 송강 정철로 더욱 유명한 고장이다.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주옥같은 글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송순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1584년에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대사헌이 된다.
그러나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1585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소년기의 추억이 깃든 강진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송강정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죽록정竹綠亭이라 부른다.
송강 정철은 이곳에 4년간 머물면서 20리 거리에 있던 식영정息影亭을 오가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을 짓는다.
정치의 허망함을 알았을 터인데 그는 다시 정계로 나갔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처리하는 책임자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왔고 기축옥사를 주도했다.
서인이었던 정철은 이 사건을 자신의 정적이며 자신을 능멸하던 동인을 처단하는 기회로 삼는다.
이때 동인들은 1,000여명이나 화를 입어 거의 전멸을 당하다 시피했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유배지 강화도에서 거의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그가 강화도로 유배를 간 것은 동인들의 탄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치사는 어느 편으로 기울든 위험한 일이었다.
송강 정철은 정치 세도가의 호기만 없었다면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사람이었다.
스승이신 면앙정 송순 선생의 삶과는 비교가 된다.

 

일화 한 토막.
1579년 면앙정에서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회방연이란 선비가 과거에 합격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열리는 잔치를 말한다.
당시 수명으로는 60세를 넘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회방연을 맞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순의 나이 87세 때이다.
이 무렵 정철은 홍문관 교리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는 선조의 어사화와 어사주를 가지고 담양의 이곳 면앙정으로 왔다.
전라도의 관찰사는 물론 각 고을 원님들과 호남의 문인들이 모두 모였다.
잔치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때 성격이 호탕한 송강 정철이 나서며

"면앙정 선생님을 댁까지 우리 제자들이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의자모양의 간편한 가마인 ’남여’에 스승 송순을 태우고 네 명의 제자들은 길을 떠난다.
하인들이나 매고 가던 가마에 스승을 태우고 면앙정을 내려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선하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정철은 이런 사람이었다.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을 둘러보고는 보성으로 갔다.
싱그러운 녹차밭을 거닐며 기력을 차리고는 녹차밭 요리로 즐겁게 저녁식사를 했다.
늦은 밤에 숙소인 바닷가 다비치콘도를 찾았는데 술 먹은 밤이어서 바다구경은 생각도 못하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아침에 녹차해수탕에서 기력을 되찾아 강진으로 떠났다.

산자수명한 강진은 북쪽으로는 월출산, 서쪽으로는 만덕산, 동쪽으로는 부용산이 둘러싸 있고
탐진강이 은빛으로 빛나며 흐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이면서 고려청자 그리고 시인 김영랑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먼저 백련사를 찾았다.
고색창연한 대웅보전과 뒤를 둘러싸고 있는 동백나무숲은 장관이었다.
백련사 동백꽃 군락은 고창 선운사 동백꽃 군락에 비견된다고 한다.
저 쪽 아래로는 구강포(강진만)가 한 눈에 들어오고.
이런 곳이 명당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산초당으로 길을 나섰다.
다산 정약용은 28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의 각별한 애정을 받아 정치에 입문한다.
정조가 사망하자 남인이었던 그는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땅으로 유배를 오게된다.
유배 당시 처음 살았던 곳은 한 주막이었다.
이 주막 뒷방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이 방이 있던 집이름을 ’사이제’라 불렀다.
’사이제’에서의 생활은 고독하고 열악했다.
불운한 유배지에서 그래도 다산을 구원한 분은 혜장선사다.
혜장선사를 만나 다산은 백련사가 가까운 귤동마을 위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이주한다.
당시 귤동마을 주변은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다산’이라고 불러왔다.
이를 정약용선생은 호로 삼았다.
이곳에서 다산 선생은 10년 동안 제자를 가르치고 혜장선사와 학문을 논하면서 다양하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 18년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저술의 대부분을 다산초당에서 썼다고 한다.

다산과 혜장선사의 만남은 이러했다. 
다산의 유배생활이 어언 5년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다산은 동네 한 노인과 백련사 구경을 갔다.
마침 백련사에는 해남 대흥사 제12대 대강사를 지낸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혜장선사는 이때까지 강진에서 유배 사는 다산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첫 대면 직후 다산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보고 자기 처소로 다산을 안내하여 같이 잠을 잔다.
그 날밤 다산과 혜장은 주역을 논했다.
혜장은 다산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뽐냈다.
그러나 다산의 주역 지식이 무불통지임을 알고는 두 손을 들고 하룻밤 사이에 스승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1811년 10년 연하이며 자신을 스승이라고 했던 혜장선사가 죽는다.
다산은 초당에서 7년을 더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대 유학자와 속세를 떠난 한 스님이 서로를 인정하며 만나고 이별하던 그 길을 우리는 걸었다.
이 길은 우정의 길이며 유학과 불교가 만나던 길이다.
지금은 잘 다져진 오솔길이지만 그때는 울퉁불퉁 구불구불한 길이었으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 송강 정철의 주옥같은 가사들도 유배생활 동안에 씌어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문학은 어쩌면 고통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당쟁과 사화에서 화를 입은 선비들은 자신의 고향 산중으로 몸을 숨겨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모았으며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자리를 얻은 제자들은 이곳을 찾아와 스승께 절하며 고마움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면서 정자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으며 우리의 문학은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의 백미인 <영랑 생가>를 찾아갔다.
행랑채가 있는 생가의 대문을 들어서니 시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詩가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이며 강진읍 남성리에서 김종호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 주로 영랑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강진보통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났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감옥을 나와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를 단니던 중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일본인들의 조선인 대학살을 목격하고는 다시 고향 강진으로 돌아왔다.
김소월과 함께 우리의 언어를 가장 탁월하게 구사한 영랑은 "북에 소월, 남도에 영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슴 아린 은은한 서정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김영랑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읊으며 이번 여행기를 끝낸다.

 

안채 옆으로 장광도 그냥 있다.
그 옆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한 구절을 새겨 놓은 시비가 서 있고, 이곳이 "오 - 매 단풍 들것네" 의 모티브가 된 곳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과연 장광 뒤에는 대나무와 함께 감나무가 몇 그루 장광을 향해 허리를 비스듬히 서 있다.
비록 추석이 내일 모레는 아니지만, 입에서 "오 - 매 단풍 들것네" 하고 절로 터져 나옴을 어쩌지 못한다.


"오 - 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 - 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 - 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의 시 <오 - 매 단풍 들것네> 전문


이슬이 손발에 찬 초가을 아침, 누이는 장을 뜨러 나왔겠지.
장을 뜨려 장독을 여는 그녀의 손에 문득 골붉은 감잎이 하나 날아 떨어진다.
누이는 놀란 눈으로 장광 뒤의 감나무를 쳐다본다.
감이 붉게 익어갈 터이지만 누이는 울긋불긋 단풍들어가는 잎에 더 마음이 쏠렸으리라.
가을이 깊어지면 시집 갈 날도 머지 않은 터,
"오 - 매 단풍 들것네" 놀라는 누이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이 첫 연이다.
둘째 연은 누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정.
그는 지금 건너편 사랑방 툇마루에서 감나무를 쳐다보는 누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추석도 내일 모레, 바람이 잦은 것이 걱정이 되는, 혼인을 앞둔 누이의 마음을  왜 모르랴.
불과 8행의 짧은 시행 속에 세 번이나 반복된 "오 - 매 단풍 들것네" 에 얼마나 따스한 오누이의 정감이 내포돼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장광이 정겹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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