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샘물

묵상- 세상 걱정과 하느님 나라

뚜르(Tours) 2010. 5. 3. 07:16

묵상 :    세상 걱정과 하느님 나라

 

봄이 되니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우리 뜰에도 배꽃이 하얗게 피고, 복숭아꽃은 붉으스레 피고,

자두꽃은 연초록에 흰 빛이 신비롭다. 주위에는 목련과 벚꽃이 화사하면서도 풍요로움을 자아내며

봄의 향연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꽃밭의 튜립이 단아하면서도 너무도 선명한 노란빛과 빨간빛이 눈길을 끌고 사랑을 독차지 하려 한다.

이처럼 텃밭의 나무들과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마태복음 7장의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가 떠오른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마태7,26)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7,28-29)

 

하느님께서는 새를 자유롭게 날게 하고, 들의 꽃들도 때가 되면 곱게 피어나게 하건만 우리 인간은

의식주에 매여 일의 수고가 끝도 없다. 왜 사람은 살기 위해 걱정하며 때로는 남의 것을 탐하여 훔치고

빼앗으며 속이고 더러는 살인까지 하는가?

하늘을 나는 새처럼 들의 꽃처럼 근심 걱정 없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성경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몰라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마태 7, 31)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현실은 새처럼 또 꽃처럼 걱정에서

해방되어 안락한 삶을 살 수 없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창세기에서는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3,17)

고 했으니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말씀과는 상충되는 것 같다.

이로 미루어 보아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하지 말고 편안히 놀고먹으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상기하면 사람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기 마련인 것 같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면 모두 해결된다니 이 또한 무슨 말인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7,33)

 

하느님 나라의 의를 찾으면 새나 꽃들처럼 근심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이를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이 말씀을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 그렇구나! 이 성경 말씀은 일하지 말고 놀고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수고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 말라고도 하였으니 일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다.

열심히 일하면 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 조건이 있다. 고통 없이 그리고 근심걱정 없이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를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황막한 광야생활에서 이들 무리들은 마실 물도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어려운 삶 속에서 훔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며 의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모세는 주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고달픈 광야의 삶을 이겨내도록 하였다.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계명이고, 나머지 일곱 가지 계명은 인간 간에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아닌가.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여 시련을 이겨낼 인내심이 부족하면 우상을 섬기게 되고 또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만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고 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 사회는 질서가 무너져 혼란스러워지며 평화가 깨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상에 매달리지 말고 의로우신 하느님께 의탁하고, 잘 먹고 마시고 잘 입기 위해서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남을 사기치고 공금을 횡령하고 뇌물을 먹는 이들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입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도둑질은 남을 해치고 이 사회의 안녕을 무너뜨리는 죄악이다. 먹지 못해 먹기 위해서 도둑질하는가?

도둑질하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

죄를 짓지 말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런 의문도 생긴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든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의식주에 별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성경에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불쌍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상(돈, 권력 등)을 숭배하지 않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나아가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때 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을 때 우리는 근심걱정에서 해방되어 새나 꽃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

 

                                                                                        2010. 4. 29(목)


- 도나도님께서 주신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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