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越)나라와 남송(南宋)의 수도였던 중국 항저우(杭州)는 빼어난 풍광의 서호(西湖)가 일품이다. 오래된 탑과 고택, 성곽이 어우러진 호숫가를 거니노라면 소동파·백거이 등 대문호들의 시향(詩香)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러나 발걸음을 조금만 돌려 서호 반대편 첸탕(錢塘)강을 둘러보면 옛 풍취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초현대식 고층 빌딩이 즐비한 신천지다.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지구의 마천루, 그 천지개벽의 광경이 첸탕 강변에서도 똑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신도시 건설은 이미 시청사를 비롯해 국제회의장, 상가 빌딩, 대형 극장, 강 전망대와 공원 등 중심가가 마무리됐다.
건물들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조형미도 빼어나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해가 떠오르는 형상의 황금색 둥근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1000석의 본회의장과 20개의 소회의장이 갖춰진 국제회의장이다.
큰 새가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은 모양의 극장.
5성 홍기를 본떠 빌딩 5개를 원형으로 연결 배치한 검은색의 시청 청사.
하나같이 아름다운 건물들이 적절한 간격으로 어우러져 웅장한 건축물 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항저우시는 ‘신천지개발은 이제부터 시작’이란다.
첸탕 강변 양쪽으로 105㎢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신(新)산업단지로 집중 개발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려놓고 있다.
대충 서울 여의도의 12배다.
망치 소리가 비단 항저우뿐인가.
중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똑같이 들려온다.
이미 G2의 세계 대국으로 훌쩍 커버린 거인 중국인데 뒤늦게 놀랄 일이 뭐냐고 질책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망치 소리를 들어보라.
개발의 속도와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난달 개통됐다는 상하이~항저우 간 고속열차를 탔다.
1시간30분 걸리던 게 40분으로 단축됐다.
‘CRH380’으로 불리는 이 고속철은 시운전 결과 최고 시속이 420㎞란다.
전 세계 고속열차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철도망을 갖고 있는 중국은 2012년까지 1만3000㎞를 더 깔고, 다시 2020년까지 1만6000㎞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2013년부턴 상하이~홍콩 간을 고속철로 여행할 수 있다.
중국 산업의 발전은 이제 고속철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군자가 흐름을 얻은 군자취세(君子取勢)의 모양새다.
외형적 규모의 발전만이 아니다.
서호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 ‘인상서호(印象西湖)’를 관람하곤 기가 질렸다.
서호의 전설 백사(白蛇)와 총각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스토리 자체는 그저 그렇다.
그러나 호수를 무대로 활용한 그 상상력과 웅장한 스케일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어둠 속 물 위에서 펼쳐지는 군무(群舞), 그 위로 비춰지는 형형색색의 조명.
거대한 연작 동양화 같은 몽환적(夢幻的) 분위기가 관중을 사로잡는다.
장이머우(張藝謀) 등 3명의 감독이 연출하여 2008년 정식으로 공연을 시작한 이래 매년 관람객 50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를 무대로 활용하는 ‘인상’ 시리즈는 지린(鷄林)·리장(麗江)·하이난다오(海南島)·우이산(武夷山) 등 중국 유명 관광지 곳곳에서 절찬리 공연 중이다.
콘텐트에서도 만만찮은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활한 중국 대륙과 귀퉁이에 붙은 한반도.
동북아 지도를 들여다보자니 삼투압 현상이 떠오른다.
그동안 동아시아 경제는 한국·일본·대만 등에서 부품을 생산하고, 중국에서 조립하던 분업구조였다.
그러나 이 구조는 상하이·항저우·쑤저우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양쯔(揚子)강 삼각주 경제권이 형성되면서 깨졌다.
중국의 자체 조달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對)중국 부품 수출이 급속히 줄어드는 이유다.
최근엔 양쯔강 일대로 세계적인 IT관련 업체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2010~2011 차이나 트렌드’ 중앙일보 중국연구소편 참조).
경제적 삼투압 현상은 갈수록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다.
중국의 코앞에서 중국의 들숨날숨에 진저리 쳐야 하는 한국.
바야흐로 작동하기 시작한 중국 산업의 저 거대한 흡입력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컵에 담긴 물이 빨대로 쪽 빨려 없어지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기우(杞憂)일까.
목하 G20의 화려한 국제정치 쇼가 진행 중이다.
전 세계 최고 지도자들이 서울에 모여 지구촌의 숙제를 풀고자 머리를 맞대고 있다.
감개무량하다.
어제와 오늘은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기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이웃 중국에 빨려들지 않고 한국 자체의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일 또한 그중 하나다.
아니 화소미모(火燒眉毛, 불이 눈썹을 태우듯)의 화급한 과제다.
허남진 / 중앙일보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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