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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7일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 순교자 기념일-마르코 12,1-12

뚜르(Tours) 2011. 3. 7. 10:11

3월7일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 순교자 기념일-마르코 12,1-1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초대 교회의 순교자로 유명한 페르페투아 성녀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귀부인이었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에 대한 역사를 쓰기도 했다. 203년 무렵 그리스도교 박해가 가장 심했을 때,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하였다.
펠리치타 성녀는 페르페투아 성녀의 여종으로서, 박해와 죽음의 위협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203년 무렵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하였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여 버리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천주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오늘의 묵상* 천주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 한마음! 독서회, 봉사회님들~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지난 겨울 얼~마나 추웠던지 영영 오지 않을것 같은 봄이
우리들 마음속에 성큼
향긋함으로 자리 잡은것 같습니다.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만날수 있는
우리들만의 따듯한,시와 음악이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방에서
우리들의 멋진 꿈과 희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노래하고 이야기 해봐요.*^^*

우리님들~~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항상 기쁘고 힘차게ㅎㅎㅎ 
4월 만나는 날 까지 건강하시라고 스테파노가 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뽑으실 때 뭐가 ‘있어서’, 특출해서, 대단해서, 뽑은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불쌍해서, 가련해서, 안쓰러워서, 안타까워서 뽑으셨습니다.

 

    그 측은한 존재 이스라엘,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벌레 같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과분하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얼르고 달래면서, 감싸고 어루만져주면서 그렇게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귀염둥이 딸이 슬슬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빗나가는 것뿐 만 아니라 가서는 안 될 길,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하느님께서는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애타는 마음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제발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다시금 너와 내가 맺은 첫 계약을 기억하라고, 첫 사랑으로 돌아가자고...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보내신 심부름꾼을 그때 마다 족족 매질하고, 폭행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이루어졌었던 배신의 역사, 반역의 역사는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과분하게도 하느님께서 나를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미물 같던 나를 애지중지 돌봐주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무 상관없는 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처음의 나를 생각하면,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불만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소작인들처럼 잔머리 굴릴 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남의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과분하게 생각하면서, 그저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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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구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먄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자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벗 하나 잇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꼽동무를 불러내어
나란이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풀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 오던
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 우표를 사고
답장을 미루어 둔 친구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래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읽다가 만 책,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봄을 맞고 싶다.


사계절이 다 좋지만
봄에는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무늬의 옆치마를 입고 싶다.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가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먼지를 털어낸 나의 창가엔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 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 개 걸어 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의 외모와 함께 나의 모든 실상을
제대로 보는 이는 남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나를 아는 것이지요.”

내 잘못이 보이드라도
애써 내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고 넘어 가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나를 안다는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남이 잘못하고 있는 못된 일을 나도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착하고 선한일을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도 내안에 있습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어떤 사람의 불행한 소식을 접할때면
안타까워 하다가도 분명 지금 나 자신의 모습과
지나간 흔적들을 뒤돌아 보며 그래도 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하며 안도의 숨을 몰아 쉴 때가
누구나 있으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감사하다는 생각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즉 나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슬픔이 될 수 도 있고
나의 이득이 다른 사람에겐 손해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과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지혜로움으로 
새로운 한해를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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