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동호지필(薰狐之筆)

뚜르(Tours) 2011. 5. 21. 22:02

 

오류나 결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기록하다.
특히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깎아내려 비판한다(포폄:褒貶)’ 는 뜻으로 춘추필법(春秋筆法) 같은 분명한 사필(史筆:역사를 쓰다))을 비유할 때 쓰인다.

《춘추좌전》조(條)에 어린 나이로 즉위한 진영공(晉靈公)은 아주 어리석고 포학한 임금이었다.
그는 높은 정자 위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활로 쏘아 맞히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며 즐겼다.
또 요리사가 곰국을 맛없게 조리했다 해서 죽여 버리기까지 하는 위인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재상 조돈(趙盾)이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 번이나 조돈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결국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돈은 외지로 나가 잠시 피신했다.
그 후 조돈의 사촌형인 조천(趙穿)이 진영공(晉靈公)이 도원에서 술에 만취한 틈을 타서 심복을 시켜 감쪽같이 시해하고 말았다.
이에 조돈은 즉시 도성으로 돌아와 진성공(晉成公)을 왕위로 세우고 계속 재상 직을 맡아보았다.
사관인 동호(董狐)가 이 사실을 역사에 기록할 때 “조돈이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써넣었다.
그 기록을 본 조돈은 깜짝 놀라 급히 동호를 찾아가 일이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에 동호가 질책하는 어조로 조돈을 꾸짖었다.
“대인께서는 일개 재상의 몸으로 당시 달아나기는 했지만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으며 또 돌아와서도 죄인들을 징벌하지 않았으니, 이 죄를 대인께서 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좌전(左傳)》에서 이 사실을 서술하면서 ‘동호는 옛날 훌륭한 사관으로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았다.’고 평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또 공자(孔子)는 조돈에 대해서도 '훌륭한 대부였던 조선자(趙宣子:조돈)는 억울하게 죄명을 뒤집어썼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그가 자기나라를 떠났더라면 아무 책임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일로 인해서 공정한 사관(史官)을 칭송 할 때면 동호지필(薰狐之筆) 또는 동호(董狐)라고 한다.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하는 동호의 사관(史觀)은, 어질지 못한 임금 밑에 있는 신하는 사리판단이 분명하지 못하여 국사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서릿발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 수습은 잘 하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왕위 찬탈의 합리화를 도와주고 일신의 안위와 명예를 얻은 것과 비슷하다고 보았던 듯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 왕량(王良)의 말에 의하면,
그 임금을 알려거든 먼저 그 신하를 보고,
그 사람을 알려거든 먼저 그 벗을 보고,
그 아버지를 알려거든 먼저 그 아들을 보라.
임금이 현성(賢聖)하면 그 신하가 충량(忠良)하고
아버지가 인자(仁慈)하면 그 아들이 효성스러운 법이다.

우리말 속담(俗談)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고 하였다.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주위를 어지럽히며 살지 말 것이며,
더군다나 사회지도층 인사이거나 통치자들은 일시적인 방편을 모면하기 위하여 자기 주위 살피기를 게으르게 하여 후세의 동호(董狐) 같은 사관(史官)으로부터, 자기의 선량(善良)한 이름에 먹칠은 당하지 말아야겠다.  
 

                   
                   동암 우성영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