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예술가의 향기

뚜르(Tours) 2013. 4. 21. 23:09

 

’화가 김환기’ 하면 그의 그림만큼이나 향기롭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홉 살 선배 화가 근원(近園) 김용준과 일제 말 서울 성북동 집을 사고팔던 때 이야기다. 근원은 성북동에 집을 지어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이름 짓고 정성으로 가꿨다.
그러다가 살림이 여의치 않게 됐던 모양이다.
워낙 아끼던 집이라 남에게 넘길 수 없어 좋아하는 후배인 수화(樹話) 김환기에게 팔고 의정부로 갔다.

해방이 되자 서울 시내는 물론 변두리 집값까지 뛰기 시작했다.
크게 웃돈 얹어줄 테니 노시산방을 팔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물론 수화는 집을 팔지 않았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자기에게 집을 팔고 떠난 선배에 대한 미안함과 그 집값이 갑자기 오르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수화는 어느 날 서울에 올라온 근원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근원이 당시 쓴 수필에 나오는 말이다.

"그 후 수화는 가끔 나에게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그가 사랑하는 골동품도 갖다 주곤 했다. "

근원은 "많은 친구를 사귀어 보고 여러 가지 일을 같이해 봤으나 의리나 우정이나 사교(社交)란 것이 어느 것 하나 이욕(利慾) 앞에서 배신을 당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는 "노시산방이 백만원이 되든 천만원이 되든 그것은 한 덩어리 환영(幻影)에 불과한 것"이라며
"단지 그 환영을 인연으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순수한 예술가를 얻었다는 게 기쁠 뿐"이라고 했다.

수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평생 남긴 예술혼의 자취를 지난 주말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보았다.
수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리고 있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시회다.
’어디서…’는 수화의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시에 나오는 구절로 수화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하다.

전남 신안의 섬 지주 아들로 태어난 수화는 아버지가 작고한 후 집 금고에 있던 소작인들 빚문서를 소작인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스스로를 소유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서울대 미대 교수, 홍익대 학장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화단에서 지위도 탄탄했지만
쉰 나이에 모두 훌훌 내려놓고 현대 미술의 중심인 뉴욕으로 갔다.

’어디서…’ 전시에는 1930년대부터 1974년 뉴욕에서 작고하기까지 수화의 대표작 70여점과 메모, 물감 묻은 저고리, 쓰던 붓, 아끼던 파이프와 라이터 등 그의 체취를 전해주는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가 미국 시절 뉴욕타임스 위에 그린 작품도 걸려 있었다.
그 무렵 수화는 그림 재료는 물론 생활비도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
신문지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목재소에서 나무를 사다가 캔버스를 직접 만들어 그리기도 했다.
스스로 자초한 궁핍 속에서 그는 오로지 자기 예술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고투(苦鬪)했다.
어느 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거의 다 완성돼 가는 그림을 부숴버렸어.
용기가 필요해요. 부수는 용기 말이야.
자잘한 것 뭉개버리고 커다란 주제만 남겼지.
행결 좋아졌어요.’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수화의 위치가 어떻고, 지금 그의 작품이 얼마나 높은 값에 거래되는지 얘기하는 것은 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태에서 예술가는 버리고 비울수록 더 큰 성취와 명예를 얻게 된다는 예술사의 역설은 큰 깨침으로 다가온다.
자기를 비움으로써 어떤 욕망도 해내지 못한 성취를 이룬 예술가의 흔적이 수화 탄생 100주년 전시에는 있었다.


김태익 / 조선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