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벚꽃이 피고지고

뚜르(Tours) 2013. 4. 22. 23:59

4월 초 남해안에서 피기 시작한 벚꽃이 달리고 달려서 보름 만에 여의도 둑길을 하얗게 뒤덮었습니다.
벚꽃은 피고 지는 모습이 너무나 폭발적이어서 화려하고 또한 처연합니다.

벚꽃처럼 봄의 기운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꽃나무도 드물 것입니다.
같은 나라에 살지만 벚꽃은 위도와 고도에 따라 개화 일자에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벚꽃 철이 되면 일본이나 미국 동부에서는 ‘벚꽃개화지도’가 일기예보의 인기 단골 메뉴가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벚꽃 구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방송사들이 벚꽃개화지도를 종종 내보냅니다.

제주도는 일본학자들도 뒤늦게 인정한 왕벚나무 자생지입니다.
제주도의 해안 도로변에 있는 벚나무는 이미 4월 초순에 꽃을 피우고 지금은 새싹으로 가지를 단장했습니다.
그러나 해발 500미터 이상 되는 한라산 중턱에는 보름 정도 늦게 왕벚나무와 산벚나무가 연두색 숲을 하얗게 수놓았습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5ㆍ16도로는 해발 570미터의 새미오름 앞을 지나갑니다.
이곳에 옛날 제주 목사(牧使)가 산신제를 올렸던 산천단(山川壇) 터가 있습니다.
봄이 오면 눈이 쌓인 백록담에 올라가는 대신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에는 두어 개의 비석만 남아 있을 뿐 제사를 올렸던 제단 같은 유적은 없습니다.
대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500~600년의 곰솔이 신령스럽게 정좌해 있고
그 주위로 대나무 삼나무 등 여러 종류의 상록수가 호위하듯이 서 있습니다.

이곳에 시멘트로 쌓은 허름한 집이 있습니다.
‘바람카페’라는 이름을 붙인 커피숍이 무당집을 닮았습니다.
벚꽃 철에 이 카페 문간에서 서서 내려다보면 인상적인 경치가 펼쳐집니다.
푸른 솔과 하얀 벚꽃이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 상록수 숲에서 평소 벚나무의 존재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4월 중순이 되면 벚꽃은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푸른 솔잎을 배경으로 미풍에도 꽃잎은 하염없이 떨어집니다.
여기서 보면 솔잎은 붙어 있기에 고매한 존재인 것 같고 벚꽃은 떨어지기에 아름다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피었다 떨어지는 모습이 사무라이 정신을 닮았다고 해서 벚꽃은 일본을 상징하는 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2차 대전 중에는 가미가제의 모습을 벚꽃의 낙화에 비유하고 격려하는 것이 일본사회의 풍조였다고 합니다.
일본인의 벚꽃 사랑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 열도 전체를 벚나무로 심어놓고 봄을 따라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북상하는 벚꽃을 보며 경탄하는 사람들이 일본인들입니다. 100엔짜리 일본 동전에 벚꽃을 새겨 넣은 것만 보아도 일본인과 벚꽃의 관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벚꽃을 좋아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급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일본이 벚나무를 전해주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한 얘기이고,
기념이 될 만한 이벤트가 생길 때마다 호주, 독일, 캐나다, 화란, 브라질 등에 벚나무를 선물했습니다.
봄이 되면 일본이 보낸 벚나무가 활짝 꽃을 피우고 그곳 사람들은 일본을 떠올릴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때 일본인들이 심었던 벚나무를 뽑아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상기되었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식물에게는 국경이 없습니다.
살기 좋으면 싹을 키우며 삽니다.

벚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개화와 낙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니라 ‘피고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같은 봄꽃이라도 다른 꽃들은 ‘피다’와 ‘지다’라는 말을 분리해야 어울리지만,
벚꽃이 피는 것과 지는 것은 별 시차 없이 이뤄집니다.

벚꽃이 피고지는 모습은 마치 나이 먹은 사람이 느끼는 시간 개념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벚꽃이 피고지면 그렇게 한 해가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나이 든 사람만 아니라 젊은이들도 벚꽃을 보며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입니다.



김수종 / 자유칼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