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미국 뉴욕·워싱턴을 다녀왔다.
한국 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주관하는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지난 23일, 새누리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북방한계선) 발언 발췌록을
공개한 직후였다.
미국으로 향하는 내내 직업병(病)인지 몰라도, NLL을 피해 ’스노든 논란’의 한복판으로 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직원인 스노든이 그간 미국 정부가 우방과 적국, 개인과 단체를 가리지 않고 도청·감청 활동을
벌여왔다고 폭로한 사건을 놓고 미국 전체가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상은 빗나갔다.
TV를 켜도, 신문을 펼쳐도 스노든 사건은 주요
뉴스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다.
NSA는 미국 정보기관 중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조직이다.
스노든의 ’활약’으로 NSA의 실체가 드러났고
미국은 세계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스노든은 현재 은신처인 홍콩을 떠나 모스크바 공항에 머물고 있다.
당초 그의 망명에 호의적이었던
에콰도르 등이 말을 바꾸면서 2주일 가깝게 공항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국제 미아(迷兒) 신세가 됐다.
이쯤 되면 스노든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의 초점이 되고도 남을 듯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머무는 동안 미국인들이 스노든 문제를 화제로 삼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뉴욕
TV 방송국은 백인 주부를 구타하는 흑인 도둑의 모습을 되풀이해서 보여줬고,
신문의 머리기사는 대법원의 동성(同性) 결혼 허용 판결 같은
국내 뉴스가 차지했다.
스노든과 관련된 뉴스로 눈길을 끈 것이 있다면 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넷루츠 네이션(Netroots Nation)’이 주최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봉변을 당한 소식 정도였다.
펠로시는 우리로 치면
’강남 좌파’형 정치인이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그는 재산만 우리 돈으로 500억원에 육박하는 갑부다.
평소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자처해 온 그가 민주당 좌파 핵심들이 총집결하는 넷루츠 네이션 집회에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단체는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에 2008년과 2012년 연거푸 대선 승리를 가져다 준 공신(功臣)이기도 하다.
오바마 역시 매년 넷루츠 네이션 집회에 축하 메시지를 전했고,
지난달 말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집회에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펠로시는 바로 그 집회에서 스노든
문제를 거론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민주당 지지층이 듣고 싶어하지 않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펠로시는 "여러분은 스노든을 영웅 취급하고
싶겠지만 미국의 안보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과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스노든은 미국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거짓말" "꺼져" 같은 고함과 야유가 쏟아졌다.
펠로시를 보면서 한국 상황을 떠올렸다.
민주당은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록에 대해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짜고 고의적으로 왜곡·훼손한 내용"이라고 발끈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 발언의
전체 맥락을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에 나선 대한민국 대통령이 전체 맥락을 봐야만 납득할 수 있는 발언을
했다면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
민주당이 아무리 부인해도 노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에게 "괴물 NLL… NLL은 국제법적 근거가
없고…" 같은 말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민주당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패한 가장 큰 이유는 안보 문제 등에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NLL 파동은 민주당에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만약 민주당이 노 전 대통령 발언에 분명한 선을 긋고 난 다음,
여권(與圈)이 국정원 문서 공개 과정에서
보여준 국가 안보 문제에 대한 정략적 접근을 정조준했다면
야권 지지층 일부가 반발했을지 몰라도 국민 대다수의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6년 전 남북 회담록을 놓고 나라 전체가 홍역을 치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지지층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편한 길을 택했다.
NLL 문제를 정쟁(政爭)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승승장구하는
미국 민주당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거듭 고배를 든 한국 민주당의 차이를 새삼 실감케 하는 요즘이다.
조선일보 <박두식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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