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두브로브니크, 그 魅惑(매혹)과 迷惑(미혹)

뚜르(Tours) 2013. 8. 25. 17:04

발칸반도 크로아티아의 해안 성곽 도시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 불린다.
눈부신 태양 아래 코발트색 바다와 하얀 성벽이 어우러지고,
성 안에 임립(林立)한 주황색 지붕의 건물들로 빛나는 7월 중순의 옛 도심(都心)에선 여름 축제가 한창이었다.
극작가 버나드 쇼가 ’지상의 천국’이라 찬탄한 이 도시의 풍광(風光)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러나 불과 20여년 전 두브로브니크는 지옥이었다.
1991년 유고연방 해체 후 폭발한 내전이 도시를 강타한 것이다.
세르비아군의 무차별 포격과 봉쇄로 건물 절반이 파괴되고 시민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두브로브니크를 구한 것은 유럽 문명의 정화(精華)인 이 도시를 인간 사슬로 지켜낸 서유럽 시민사회의 캠페인이 촉발한 나토의 군사 개입이었다.
그 후 유네스코는 대대적인 두브로브니크 재건 작업에 나서 1994년 옛 도심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두브로브니크 골목길 풍경은 7세기부터 1400년 동안 지속된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큰길과 골목길 전부를 하얀 대리석으로 포장한 그들의 부(富),
14세기에 수돗물과 대중 의료 체계를 완비한 공공 인프라,
1000년간 베니스와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다투면서 시민공화정을 실현한 유럽 자유 상업 도시의 선구자가 바로 두브로브니크다.
런던·파리·로마·밀라노·피렌체·베니스 등의 경쟁 도시를 능가하는 두브로브니크의 풍요와 자유,
그 해안 성벽 도시의 독보적 모습은 ’도시의 공기(空氣)는 자유다’는 금언(金言)을 웅변한다.
이 자유 상업 도시들의 존재 없이 근대의 시장경제와 시민적 자유는 생겨날 수조차 없었다.

두브로브니크가 체현한 문명의 성취와 유고 내전은 빛과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대비된다.
1991년부터 10년 가까이 발칸 전역이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의 난전(亂戰)으로 얼룩졌기 때문이다.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이 되어 집단 살육을 일삼는 발칸반도는 과연 ’유럽의 화약고’임을 입증하는 듯 보였다.
이를 종교와 민족이 엇갈린 문명 충돌의 사례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미국의 발칸 특사 리처드 홀브룩(R. Holbrooke)은
유고 내전을 종결한 데이턴 협약(Dayton Agreement)을 중재하면서
’유고연방의 비극은 결코 운명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일갈(一喝)한다.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종 갈등을 부추긴 정치 지도자들의 범죄적 행위’가 유고 사태의 핵심이라는 촌철살인의 진단이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NLL 정국에서 한국의 여야는 적대적 공존 관계로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애국심과 민족의 미명으로 포장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 파국으로 치달은 발칸반도의 정치인들처럼
새누리당 강경파와 민주당 친노파도 국민과 국가를 볼모 삼아 갈등을 부풀리는 중이다.
총칼만 손에 안 쥐었을 뿐 막말과 욕설로 상대 진영을 난도질하는 데 바쁜 그들에게 긴급한 국가 현안과 민생 문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나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전 대통령이
부족주의(部族主義)적 정치 행태로 발칸반도의 파탄을 초래한 것같이
정치적 부족주의에 매몰된 한국의 여야 정치인들은 소모적인 NLL 공방(攻防)으로 한반도의 안녕을 위협한다.

실체가 드러난 NLL 문제조차 대승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국의 제도 정치권이
멀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한반도의 중대 변화에 제대로 부응할 리 없다.
역사를 오도(誤導)한 정치인의 야심과 그에 휩쓸린 군중의 부화뇌동이 위기를 부르는 현상은
발칸반도뿐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익숙한 정치적 체험이다.
정치와 정치인이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켜 시민의 삶을 총체적으로 무너뜨리는 길로 질주한 발칸반도를 주유(周遊)한 여행객의 경험은 발칸 못지않게 험난한 한반도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푸른 바다와 주황색 지붕이 교차하는 두브로브니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아드리아 해의 석양은 우리를 매혹한다.
대낮의 번잡함을 뒤로 한 채 펼쳐지는 항구도시의 평화와 정밀(靜謐)은 그러나 치명적 미혹 하나를 감추고 있다.
이 행복감과 편안함이 궁극적으로 훌륭한 정치에서 오는 것임을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선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세 천년의 지중해를 풍미한 두브로브니크의 영화(榮華)를
추악한 정치가 한순간에 파괴해버릴 수 있다는 진실을 유고 내전은 증언한다.
결국 발칸반도든 한반도든 잘못된 정치는 굶주린 호랑이보다 무섭다.

 

 


윤평중 /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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