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시기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와 나이가 같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바마가 나보다는 한 살 위다.
그러나 난 호적이 잘못되었다.
남들보다 일 년 일찍 학교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호적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호적은 그러라고 있는 거다.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나 시기하는 내 경우는 사실 많이 황당하다.
그러나 시기심은 나같이 철없는 사내만 느끼는 미성숙한 감정이 아니다.
시기심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예를 들어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 시기심은 더 적나라하고 치밀하다.
내가 아는 한, 교수들의 시기심이 가장 심하다.
특히 인문사회분야 교수들의 시기심은 하늘을 찌른다.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문사회과학에는 객관적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절대 타인의 우월함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열등함을 수긍하는 순간, 존재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래서 남 칭찬하는 교수가 그렇게 드문 거다.
그러나 시기심은 한 개인의 성격적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정서는 항상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 사회의 질투심과 일부다처제 사회의 질투심이 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은 아주 특별한 ’시기(猜忌)사회(Neidgesellschaft)’다.
―남의 고통을 기뻐한다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독일에는 이런 단어도 있다.
흠, 심리학이 독일서 시작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정언적(定言的) 표현이 참 다양하다.
’위험사회’ ’격차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등등.
그러나 시기사회처럼 한국 사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표현은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사건 뒤에는 어떠한 방식이든 시기심이 작동하고 있다.
압축 성장이 남긴 집단심리학적 흔적이다.
신분과 지위의 변화가 너무 급작스러웠던 까닭이다.
부의 축적 또한 정당하지 않았거나 지극히 우연적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운도 실력이라고 우긴다.
젠장. 이런 현실에서 하루하루가 숨찬 보통 사람들이 ’시기심’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째야 하나?
시기심은 열등한 사람만의 감정이 아니다.
열등한 사람과 간격이 좁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월한 사람의 시기심이 더 무섭다.
’있는 사람이 더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감정을 독일의 ’시기심 전문가’(?) 롤프 하우블은 ’간격시기심(Abstandneid)’이라고 정의한다.
한참 ’아랫것’이 어느새 부쩍 자라 자기 자리를 치고 올라오는 것에 대한 ’윗사람’의 불안이 적개심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프로이트가 수제자인 융의 급성장을 도무지 견디지 못해 자기 학파에서 쫓아내고, 평생 증오했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렇다고 시기심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우블은 ’정당한 시기심’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사회적 합의는 시기심의 제도적 관리라는 거다.
종교적 교리도 시기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천국의 거지가 지옥에 떨어진 못된 부자를 보고 고소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다.
못된 부자가 죽은 후에도 천당에서 희희낙락한다면 도대체 신은 뭐하는 거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개인적 야심은 물론, 사회적 변동을 가능케 하는 혁신적 사상의 배후에는 이러한 ’정당한 시기심’이 작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양한 외피를 입고 나타나는 시기심을 세련되게 다루는 방식을 ’문화’라고 한다.
오늘날의 인간 문명을 가능케 한 가장 결정적인 심리학적 요인은 둘이다.
’섹슈얼리티’와 ’시기심’(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일단 섹슈얼리티는 프로이트가 명쾌하게 설명했다.
’직접 하는 게’(!) 여러모로 복잡하고 불편하여, 인간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성적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거다.
섹슈얼리티의 공공적 합의 결과가 오늘날의 ’아름답고 우아한 문화’라는 것이 프로이트적 문명론의 핵심이다.
한편, 시기심에 대한 전 인류적 저항은 섹슈얼리티보다 훨씬 더 집요하다.
어떤 문화권이든 빠지지 않는 공통 잠언이 있다.
바로 ’겸손하라!’다.
폼 잡고 싶어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젠 또 겸손하라고 한다.
환장한다.
도대체 왜 인간은 꼭 겸손해야만 하는 걸까?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의 시기심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순간 바로 ’아웃’이다.
헤겔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이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요즘 ’한 방에 훅 가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거다.
연예인들이 요즘 부쩍 토크쇼에 나와 눈물 흘리며 "나도 힘들고, 괴롭고, 어렵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집단적 시기심의 표적이 되는 것이 두려운 까닭이다.
시기사회의 근본 문제는 자신의 시기심에 관해 아무도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사회적 담론의 부재가 한국 사회의 밤 문화를 그토록 천박하게 만드는 것처럼,
시기심에 관한 사회적 성찰의 부재는 온갖 분노와 적개심이 모두 정당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집단적 사디즘이 도덕적으로 타당하고 이념적으로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품격 있는 사회란 시기심의 세련된 관리를 의미한다.
분노와 적개심이 치밀 때마다, 이 분노의 근원이 과연 ’정당한 시기심’인가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내 친구 귀현이처럼 휜 바나나 따위에 시기심을 느끼는 경우는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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