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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오늘의 묵상(연중 제22주일)

뚜르(Tours) 2013. 9. 1. 00:11

 

오늘의 전례(연중 제22주일) 한국교회는 해마다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면서, 신자들이 순교자들을 기억하 며 그들의 삶을 본받도록 이끌고 있다. 순교란 신앙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치는 행 위이다. 순교자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 려고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를 받아들였다. 이 9월은 특별히 이 땅의 순교 성인 103위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때이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 성월은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 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이듬해부터 해마다 9월 26일을 '한국 치명 복자 79위 첨례(축일)'로 지내기로 하였는데, 이날이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 (1846년) 때 순교한 79위 복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순교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1866년)의 순교자 24위가 시복되었다.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103위 복자를 시성하였다(시 성일은 5월6일). 한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복자 성월'을 선포하지는 않았으나 1925년의 79위 시 복 이후로 복자들을 현양하고 공경하는 신심이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9월을 복 자 성월로 지내게 되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 103위의 시성에 맞추 어 복자 성월을 '순교자 성월'로 바꾸고, 9월 20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안드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정하였다. 순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순교자들은 평소 하느님을 체험하 며 살았기에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다. 오늘날은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언하는 순 교의 시대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분들의 순교 영성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이겨 내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그 첫걸음일 것이다.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참지혜가 무엇인지 서술하고 있다.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말씀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제1독서). 시나이 계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을 두려워하였 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은 우리는 천상 예루살 렘 안에서 하느님을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어 는 바리사이의 집에서 사람들이 윗자리를 탐하는 것을 보시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이가 높아진다고 가르치신다(복음). 제1독서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 으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 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집 회 3,17-18.20.28-29) 제2독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 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 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히브 12,18-19.22-24ㄱ) 복음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 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 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 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 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 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 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7-14)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되었을 때에 윗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자리'가 단순히 공간적인 뜻만은 아 닐 것입니다. 우리가 앉고 싶지 않은 자리라면 거기가 바로 끝자리입니다. 이를테 면 주일인데도 성당에 가기 싫다면 성당 좌석이 곧 끝자리입니다. 제삿날이지만 시댁에 가기 싫다면 시댁이 곧 끝자리입니다. 교회 활동으로 어려운 가정을 방문 해야 하는데, 갈 때마다 불편하게 느껴지면 바로 그 집이 끝자리입니다. 보좌 신부 때에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잦았습니다. 스무 명이 넘게 모이는데, 보통 친한 이들끼리 가까이 앉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다소 소 외되는 이들은 한쪽 구석으로 몰립니다. 결국 한쪽에는 인기가 좋은 이들이, 다 른 쪽에는 소외되는 이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보좌 신부인 저는 어디에 앉아 야 했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좀 더 매력 있는 청년들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 나 저는 그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에게서 "우리 신부님은 청 년들을 편애하지 않는 것 같아."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가기 싫은 자리, 하기 싫은 일,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끝자 리'에 앉는 것이고, 겸손을 향한 지름길입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면, 앉고 싶은 자리만 앉으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려고 하면 겸손을 배우지 못합니다. 겸손을 배우려면 '끝자리'에 앉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매일미사에서 옮김) ----------------------------------------------------------- 오늘의 기도 "하느님,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새 계약의 잔치로 부르시니, 이 식탁에 앉는 모든 이가 한 형제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가 보잘 것없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3. 9. 1. Martinus

대영광송 /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