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물러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을지니…

뚜르(Tours) 2013. 12. 24. 00:46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중국 고사가 있다.
장횡거(張橫渠·1020∼1077)는 송나라 때 높은 학식과 명강연으로 이름을 날린 학자다.
어느 저녁 정씨 성을 가진 젊은 형제가 그를 찾아왔다.
이들은 함께 유교 경전인 주역을 논했다.


다음 날 장횡거는 강의할 때 깔고 앉던 호랑이 모피를 거두고(撤皮)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난날 강의한 것은 도를 혼란하게 한 것이니라.
두 정씨가 근래에 왔는데, 도를 밝게 알고 있어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더라.
그대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호피는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하는 상징적 물건이다.
장횡거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다.
저서 ‘정몽(正蒙)’에서 “땅이 하늘을 따라 왼쪽 방향으로 돈다”며
별과 달의 움직임에 대해 상세한 묘사를 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것보다 약 50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런 그가 후배 정씨 형제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리를 선뜻 내주고 떠나갔다는 일화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학자들의 귀감이 됐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도 “호피를 걷어내는 일에 인색하지들 말게”라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횡거철피’ 외에도 동양의 역사서와 경전에는 제때 물러남으로써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명예를 높였던 이들의 기록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고 그칠 줄 모르는 어른이 많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오히려 더 물러서지 않는 어르신도 적지 않다.


권력의 자리를 단숨에 걷어낼 줄 알았던 장횡거의 소탈한 현명함이 이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는 물러난 후에도 앞서 언급한 ‘두 정씨’인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이·1033∼1107)와 함께 송나라 유학, 즉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고연희 / 이화여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