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흔적 / 강연호

뚜르(Tours) 2023. 11. 3. 09:08

 

 

흔적   / 강연호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 부러졌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한참 뒤에 문득 생각난 듯이 부러졌네
모든 게 흔적이네
무수한 나무들 중에 그 나무를
무수한 나뭇가지들 중에 그 가지를
선택하고 선택받은 운명의 흔적이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
새는 날아가도 흔적은 남네
그 여운 고스란히 견뎌내려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다가, 용쓰……다가
나뭇가지 기어이 부러졌네
흔적의 무게 견디지 못했네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네
날이 갈수록 흔적은 무게를 더하네
아무도 흔적을 지탱하진 못하네
이 정도 흔적의 무게쯤
너끈히 견딜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시절
내게도 있었네, 아니 정말 있었나?
잘 모르겠네 기억나지 않네
그것 역시 흔적이네

- 강연호,『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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