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작가 : 조속(趙涑. 1595-1668).
조선 중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또는 창추(滄醜). 병조판서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문인 화가 지운(之耘)의 아버지.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까치를 잘 그려 '조까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고매서작(古梅栖鵲)〉과 <매작도(梅鵲圖)〉 외에 공필(工筆)로 그린 채색의 <금궤도(金櫃圖)〉가 있다.
2)제작년도 : 1635(인조 13)
3)종류 :비단에 채색
4)크기 : 105.5cm x 56cm
5)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6)작품 해설: 조속의 <금궤도>에는 위쪽에 이 그림을 그린 뜻과 화가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회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채색화인 이 그림은 중앙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금궤가 매달려 있으며, 밑에는 흰 수탉이 울고 있다. 위쪽에 적힌 내용으로 보아 신라 김알지의 시조 설화(始祖說話)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진한 채색을 써서 장중하게 표현하였는데, 채색화가 드문 조선시대의 채색화 전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수묵화가로 유명한 조속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금궤가 매달린 나뭇잎의 모습이나 배경의 구름이 신화의 내용에 더욱 환상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신라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또는 太輔公-諱 閼智)
시조인 대보공(휘 알지)은 서기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 4일,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금성) 서쪽 계림(鷄林, 또는 始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
금궤 속에서 나온 동남(童男)이 마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고사와 같으므로(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 했다. 이 '알지'는 향찰(鄕札-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하던 신라시대의 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소아(小兒),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알지'를 신라김씨(안동김씨 포함)의 시조로 모신다.
이에 대한 <三國遺事>(一然 著)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永平3年 庚申(一云 中元 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 弧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掛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足倉足倉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
<해석>
영평3년(서기 60년, 탈해왕 4년) 경신(혹은 중원 6년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 뿐이었다.)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의 서리(西里)를 걸어 가고 있었는데, 큰 광명이 시림(始林-혹은 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쳐 있었고, 그 구름 속에는 한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바로 그 궤로부터 나오고 있던 것이었고, 그 나무 밑에서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이 모습을 왕(석탈해왕)께 아뢰자 왕은 친히 그 숲으로 행차하였다. 그리고 왕이 그 궤를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서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는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는데(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왕은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고 이름하였다. 알지는 곧 우리말로 '아기(小兒)'를 일컫는다. 왕은 이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들어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세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뒤에 파사왕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仇道 혹은 仇刀라 함)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三國遺事>李丙燾譯.大洋書籍 刊. 1972. p104)
<신라김씨의 분관(分貫) 및 개성(改姓)>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이 신라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경제 기획원의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武烈王)의 5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始祖)로 하는 강릉김씨,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始祖)로 하는 광산김씨, 신무왕(神武王)의 후손인 김영이(金令胎)를 시조(始祖)로 하는 영산(永山, 영동)김씨,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 김선궁(金宣弓)을 시조(始祖)로 하는 선산(일선)김씨, 문성왕(文聖王)의 5세손 김락(金樂)을 시조(始祖)로 하는 당악(唐岳)김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은 아홉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 김운발(金雲發)은 나주김씨, 셋째 김명종(金鳴鐘)은 경주김씨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金殷說)은 경주김씨 은열공파, 다섯째 김석(金錫)은 의성김씨,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金鐥)은 언양김씨, 여덟째 김추(金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김씨, 아홉째 김덕지(金德摯)는 울산김씨 등이 되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는데,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은 안동김씨로, 5세손 김봉기(鳳麒)의 넷째 아들은 김녕김씨로 분관했다.
김방경의 넷째 아들은 대구김씨로, 7세손은 도강김씨로, 13세손은 밀양김씨로, 5세손은 서흥김씨로, 그 후손 중 안악김씨, 안산김씨가 나왔고, 14세손은 야성(영덕)김씨로 분관하였다.
김녕에서 분관하여 양근김씨, 9세손에서 양주김씨, 후손에서 연주김씨, 4세손에서 영광김씨, 후손에서 영산(靈山)김씨, 15세손에서 월성김씨, 8세손에서 전주김씨, 첫째 아들 김정구의 11세손에서 청풍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기타 첫째 아들 김일(鎰) 후손은 통천김씨, 여덟째 아들 김추의 아들 김우(金佑)는 희천김씨, 여섯째 아들 김건의 후손은 영월김씨, 홍주김씨 등으로 분관하였다.
신라 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간 성씨는 김행(幸)이 안동권씨(權氏)로, 김순식(順式)은 강릉왕씨(王氏)로, 김궁예(弓裔)의 후손 김순백(珣白)은 광산 이씨(李氏)로, 세광은 감천문씨(文氏), 김은열(殷說)의 13세손 김영규(永奎)는 수성최씨(崔氏) 등으로 각각 개성(改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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