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서예사를 다시 쓰다] 시서화 삼절인 조속 (趙涑)
조속은 전북출신이 아니면서도 임피현령을 지냈고, 김제군수(4년) 시절에는 이 지역 서예사의 대부격인 명필 宋日中의 스승으로 전북서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 이에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특히 그동안 전북서예의 맥을 송일중으로부터 이어왔다고 학계에서는 주장하고 있으나 송일중이 전북서단에서 우뚝 설 수 있기까지는 해박한 학문과 많은 금석자료를 수집하여 국내에서 최초의 금석자료를 수집 정리한 조속이 있었다.
“금석청완(金石淸玩)을 집필한 창강(滄江) 조속(趙涑)을 연구하는 것이 순서라 사료되어 정리해 본다.
조속(趙涑: 1595~1668)은 서, 화가로 字는 희온(希溫)이요 호는 창강(滄江) 창추(滄醜) 취추(醉醜) 취옹(醉翁) 취병(醉病)등이며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그의 부친은 광해군 때 현감 수륜(守倫)으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연좌되어 음형(淫刑)을 받고 옥중에서 죽었다.
그는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록을 사양하고 그날로 고향에 돌아와 훈명(勳名)을 한사코 사양했기에 지조있는 선비로 추앙을 받았다.
후에 유일(遺逸)로 등용되어 장령(掌令 : 사헌부의 종4품) 진선(進善 : 세자 시강원에 소속된 정4품으로 학식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에 이르렀으며, 효종 때는 시종으로 추천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후 임피현령(종5품직 1634~1639) 시절에는 아직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김제군수(종4품직 1645~1649)를 역임하면서 이지역 유림 백석 유집(白石 柳집 1585~1651 :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시강원 자의와 찰방을 역임)등과 교류하면서 그의 제자인 송일중을 창강에게 천거하니 첫눈에 그를 보고 장래에 크게 촉망되는 인재라 느껴 이때부터 그의 문하에 두었다. 송일중은 당,송사(唐宋史)등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정진하여 통달하고 많은 금석자료를 남겨 그의 서법이 독보적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창강은 지방수령에 있으면서도 청백리로써 학문과 서화에 정진하여 고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으니 현재 백석서원(백석 유집, 창강 조속을 배향)에 모셔졌다.
“근역서화징”(오세창저)의 기록에 의하면
·『김제군수 조속에게 부치기를』 깨끗하기는 흰옷같고 곧기는 활시위와 같으니 (淸如寒玉直如絃<청여한곡직여현>) 삼절을 겸한 재주는 바로 노숙한 정건(鄭虔) (三絶才兼老鄭虔<삼절재겸노정건)) 운각(芸閣)에서 어찌 이런 날 선비를 용납할소냐 (雲閣容儒素寄<운각거용유소기>) 먼 시골에서도 이원님의 어짐을 알고 있을게다 (萍鄕應識使君賢<평향응식사군현>) 망천(輞川 : 王維)은 본래 시와 그림에 능한 사람이요 (輞川本是詩兼畵<망천본시시겸화>) 송설(松雪 : 趙孟)은 사람들이 그림이 시보다 낫다고 한다. (松雪人言畵掩詩<송설인언화엄시>) 한폭의 산수화에 좋은 화제(畵題)까지 곁들였으니 (一幅湖山題好句<일폭호산제호구>) 누워서 구경하는 이마음 혹 아는 사람이 있을는지
(臥遊心事相知<와유심사당상지>)』
◎ 택당집 ·『창강선생 조속의 만사(挽詞)에 이르기를』 순수한 금은 더욱 단련되고 옥은 더욱 견고하나 (精金益鍊玉彌堅<정금익련옥미견>) 타고난 성품이 본래 대현(大賢)이었네 (資性元來是大賢<자성원래시대현>) 사업은 일찍이 사직(社稷)을 붙잡았고 (事業己曾扶社稷<사업기증부사직>) 마음씨는 도리어 도잠(陶潛 : 陶淵明)과도 같아라 (襟期還復類潛淵<금기환복류잠연>) 일생에 조용히 그림과 글씨를 벗삼았고 (一生靜對圖書地<일생정대도서지>) 늘그막에 먼 시골에서 한가로이 지내셨네 (晩歲長閑寂寬邊<만세장한적관별>) 갑자기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으니 (飇馭忽驚遊漫<포여홀경유오만>) 인간의 칠십세가 바로 신선이었었네 (人間七十卽眞仙<인간칠십즉진선)
창강유고(滄江遺稿)의 발문에 이르기를
선생을 뵈올적 마다 온 집안이 텅 비어 쓸쓸하고 아침저녁 끼니조차 끓이지 못했으나 그래도 항상 태평스러우셨다. 오직 그림과 글씨만을 좋아하셨으니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구경하느라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또 그 붓끝으로 그려내는 글씨와 그림이 절묘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두 보배로이 간직하고 있다. 선생이 그 높으신 재주로 으레 능하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만 세상에 시문이 전하는 것이 없으니 이는 대개 선생이 일찍 그 아버지의 원통한 일(광해군대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무옥에 연류되어 죽었다) 때문에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서 어쩌다가 답답한 회포를 글씨와 그림으로 푼적 은 있으나 한번도 글 짓는데는 뜻을 두지 않아서이니 세상에 전하는 시문이 없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지호집)
창강의 『경명(鏡銘)에 이르기를 “나는 들었다. 창강 노인이 서화에 뛰어나 모두 묘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뒷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다가 보배로 여겼다. 그리하여 비록, 한 폭의 그림과 한자의 글자라도 천금과 같이 여겼다. 글씨는 진실로 마음의 획이요 그림 역시 바로 신과 통하는 것이다.(하략) (근재집)
임천(林川)의 회양(淮陽) 조사렴(趙思廉)의 묘갈과 김제(金堤)의 이상(二相 : 조선시대 의정부의 종1품인 좌찬성과 우찬성) 이계맹(李繼孟)의 비를 썼다.(해동금석총목) 필적모간(대동서법)(고금법첩)
이상 창강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평가한 글에서 그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 그리고 그의 예술세계를 엿 볼 수 있다. 또한 『해동금석총목』이나 『국사대사전』에 기록된 “이계맹신도비”에 대해 이처럼 중요한 비문이 아직 이 지역 시, 군지(郡誌)나 어느곳에도 기록되지 않아 필자는 이 비를 찾기 위해 “전라금석문연구회”(회장 김진돈) 회원들과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답사 끝에 일년여만에 김제시에 있는 이 비를 찾았다.
우선 탁본을 위해 지난 2005년 6월 6일 휴일에 비문을 대할 때, 반가운 마음 금할 수 없었으나 “전의 이씨 김제 입향조”의 묘소답게 제실에 비각 석등 문관석등 석물이 위풍당당 했으나 “석등”은 “전북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국사대사전”에도 기록된 중요한 이 비문(碑文)은 지정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후손들이나 문화관련 학자들이 금석문에 대한 전문성 결여로 사료되어 우선 탁본을 떠 보기로 하고 360여년동안 풍상에 마모되고 이끼가 비문을 덮어 솔로 벗겨내고, 물로 씻어 보니 문자는 알아볼 수 있어 탁본을 했다. 역사의 기록물을 처음 뜬 탁본이라 들뜬 마음으로 석문을 하니 별첨과 같다.
※ 별첨. 비문 · 비문의 내용 주인공인 이계맹(李繼孟 : 1458~1523)은 전의 이씨 김제 문중의 개창조로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귀양을 가는 화를 입었으나 그후 기묘사화에는 김제에 내려와 화를 면하여 좌찬성에 오른 인물로 그가 별세한지 100년이 지났어도 묘비와 명(銘)이 없어 조속이 김제군수 부임 후 공의 풍묘모 인격을 흠모하여 그의 현손에게 양주에 김상헌을 찾아가 비문을 받아오도록 하고 본인이 비문을 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글씨의 흐름으로 보아 송일중의 글씨가 창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어, 전북 서예사에 귀중한 자료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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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건(鄭虔) : 당나라 사람으로 종이가 없어서 감잎으로 대신했다. 시, 서, 화에 능하여 삼절이라 일컬었으며 사무에도 뛰어났다.
※ 운각(芸閣) : 조선조에 경적의 인쇄와 제사 때 쓰는향, 축문, 도장등을 관장하는 교서관의 별칭
[전북중앙일보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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