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인간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젊을 적 나바호족과 호피족이 사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 5년을 살며 연구했다.
인디언들은 백인을 죄 미친놈으로 알았다.
인디언의 시간개념이 백인과 완전히 달라서였다.
“우리가 언제 도착하더라도 그 장소는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백인들은 어디를 가려면 늘 서두른다.
백인들 몸속에 들어앉은 악령(惡靈)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내몰기 때문이다.
악령의 이름은 ‘시간’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이런 얘기가 있다.
슬픔과 불안의 신(神)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영혼의 신이 거기에 정신을 불어넣고는 제 것이라고 했다.
흙의 신까지 나서 싸움이 나자 시간의 신이 판결했다.
인간에게 100년의 시간을 줄 테니 슬픔과 불안의 신이 100년 동안 주재하라 했다.
인간이 죽고 나면 정신은 영혼의 신이, 육신은 흙의 신이 되가져가라 했다.
인간은 한평생 슬픔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시간의 신은 삼라만상의 운명을 지배한다.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시간이라는 족쇄를 찬 죄수다.
그 고달픈 세상살이의 수갑을 풀고 탈출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물샐 틈 없이 조여오는/ 시간의 포위망을 뚫고/ 이웃집 아저씨가 달아났다/
그는 지금 용인 공원묘지 산1번지/ 양지바른 곳에 반듯이 누워/
안도의 숨을 쉬고 있다’(이상호 · 이웃집 아저씨의 탈출).
▶영어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명사가 time(시간)이라고 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10억 단어 분량 영문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다.
시간을 가리키는 year(해·3위) day(날·5위) week(주·17위)도 상위권이다.
인간에 관한 단어 person(사람·2위) man(남자·7위) child(어린이·12위) woman(여자·14위)이 뒤를 이었다.
한국인이 가장 자주 쓰는 명사가 ‘사람’과 ‘때’라는 고려대 연구팀 조사와도 통한다.
▶옥스퍼드대 리스트엔 시간의 신이 인생에 내린 가혹한 판결도 비친다.
work(일)가 16위에 올랐지만 rest(휴식) play(놀이)는 100위에도 못 들었다.
war(전쟁)는 49위지만 peace(평화)는 없다.
그렇다면 시간에 짓눌려 사는 수밖에 없는가.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지금 곧 세상을 하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게 남겨진 시간은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살라.”
오태진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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