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시작되는 듯 싶더니 벌써 중순을 넘어갑니다. 햇살을 가득히 안고 걷는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느끼며 걷습니다. 온몸에 가득히, 가슴에 가득히 밝고 따사로운 빛을 품으며 걷는다는 것,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틀림 없습니다 . 걸으면서 지난 금요일 철야기도회에서 한 봉사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도는 감사랍니다. 글쎄, 제가 아는 자매가 자기 체험을 들려 주는데 '정말 그렇구나'하게 되드라구요. 그 자매의 남편은 냉담자이고 매일 같이 술먹고 주정부리는 알콜 중독자인데, 큰 딸은 폐결핵으로 몸져 누워있고, 둘째 딸은 집안이 지긋지긋하다며 가출해 버렸답니다. 자매는 견딜 수 없어 본당 신부님께 상담을 했답니다. 주임신부님은 자매에게 '그저 감사 기도를 드리세요. 남편이 알콜중독자인 것을 감사하고, 딸이 폐결핵인 것도 감사하며, 작은 딸이 가출한 것도 감사하는 기도를 한 번 해 보세요.'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자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알콜중독을 치유해 달라는 기도는 잘 되어도 알콜중독자인 남편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딸이 중증 폐결핵을 앓고 있음에 감사는 더더욱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가출한 딸이 되돌아 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지, 가출한 딸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는 혀로서는 바칠 수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바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는 신부님의 말씀에 순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기도는 하지도 않고 그저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은 일주일 사이에 이 집을 축복하셨습니다. 기도한지 3,4일 되었을 때, 늘 술에 취해 늦게 돌아와야 할 남편이 저녁 일찍 맨숭맨숭한 모습으로 돌아 왔습니다. 어떻게 술 마시지 않고 집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마음으로부터 '이젠 정신을 차려야지. 이대로 가면 안돼!'라는 느낌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부터 남편이 술이 마시지 않고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례하자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즉시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교우가 그 소식을 듣더니 나이가 많으시니 힘 든 일은 못하실꺼고, 현장 경비를 하라고 추천해서 직장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빈첸시오회에서 청년들이 와서 결핵을 앓고 있는 딸을 위해 기도를 해 주고, 또 결핵 요양원을 소개해서 큰 딸은 요양원에 입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은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은 딸이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작은 딸은 엄마와 아빠에게 울면서 용서를 청하고 다시는 부모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대지 뭡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마르티노 회장님도 감사 기도를 해 보세요."
귀가 엷은 제가 그 말을 놓칠리가 없습니다. '그래!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고,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 온다는 말씀이 있지. 나도 이젠 감사 기도를 해야지.'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묵주기도 지향도 감사로 바꾸고, 화살기도도 감사 기도를 날리고 있습니다.
사실 제 주변을 돌아보면 참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훌륭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게 해 주신것부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큰형이 폭격으로 열아홉의 나이로 散火되어 막내였던 제가 맏아들이 된 것을 예전에는 팔자로 치고 한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술 취하신 아버지는 매기의 추억이란 노래를 들으며 '아버지가 옛날의 추억 속에 사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처럼 술 취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하며 아버지와 관계가 가까워지지 않았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年老한 부모님과 가족을 扶養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早熟한 아이로 성장했고, 침묵하기를 좋아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웃는 모습보다는 화난 모습이 제 본 모습처럼, 親交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평을 들으며 살아 왔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며 살면서 때때로 다른 집 아이들은 공부도 잘해서 서울대, 연대도 들어가고, 체육을 잘해서 돈도 잘 번다는데 내 아이들은 공부도 못하고, 특기도 없이 말썽만 부릴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성령쇄신 운동에 참여하며 봉사자의 삶은 산 것이 이제 꼭 9년이 되어 갑니다. 이 9년 동안에 하느님은 조금씩 조금씩 나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아주 조금씩 말입니다. 한 가지의 恩寵을 부어 주시고 그 은총을 깨달으면 다시 은총을 부어주시곤 했습니다. 지금은 이 사실을 깨달아 이 글을 쓰지만 사실 이 깨달음을 인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한 공동체에서 봉사하면서 많은 교우들과 친교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수줍음을 잘 타던 내가 담대해졌습니다. 부정적이던 감정을 조금은 온화한 모습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노력하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술 취하신 모습을 부정하던 내가 아버지의 그 격심한 고통을 이해하면서 아버지와의 사랑의 친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고통 속에 놓여 있었다면, 나는 아버지처럼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사실 아버지는 家門의 부흥을 위해 기대를 온통 걸었던 사랑하는 큰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급격히 변하는 계급사회의 붕괴, 6.25 전란을 통해 상실한 모든 재산과 사회적 지위 등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 사셨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고통 속에 살게 되었다면 나는 아버지의 10분의 1도 못 미치는 삶을 살았을 것이란 결론을 얻었습니다.
감사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 아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착한 며눌아이들이 집안에 들어 온 것을 참으로 감사합니다. 예쁘고 건강한 손녀 元熙 가타리나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둘째 며눌아이가 姙娠한 것도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많은 봉사자들을 - 저는 천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영적지도자로 문 종원 신부님, 한 정일 신부님을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고 미성숙한 나를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으로 뽑아 주심에 감사합니다.
교구 봉사회 회장이 되고 나서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은총을 부어 주셨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때론 그것이 고통이라 생각했고 극렬한 분노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것이 은총이었기에 내가 변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할 때입니다. 고통을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고통이 극렬할 수록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은총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월이 반을 넘어가는 월요일에 문득 감사에 대한 글을 쓰도록 이끄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2009.02.16
Mart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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