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눈길을 걸을 때

뚜르(Tours) 2009. 3. 6. 13:25

눈길을 걸을 때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반드시 함부로 걷지를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행적)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조선시대 큰 스님으로서 승병장으로 유명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은 통일된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해 회담을 하러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때 당시의 심정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 시로써 답을 대신하였다.
뿐 만 아니라 선생께서는 평소에도 이 구절을 즐겨 써서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김구 선생의 필적 중에도 이 구절을 쓴 작품이 남아있다.

그 누구의 발자국도 나지 않은 눈길을 처음으로 걷는다는 것은 하나의 행운이요 축복이다.
사람들은 그 행운과 축복을 온통 자기 것으로 알고서 영화〈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제멋대로 한껏 뛰어 보기도 하고 눈밭에 드러누워 자신의 모습을 눈밭에 남기는 사진(?)도 찍어본다.
그리고 눈 위에 욕심껏 글씨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본다.
그렇게 정신없이 눈길을 가다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그처럼 포근하고 고요하던 눈밭이 온통 낙서판이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낙서판이 되어있는 눈밭을 보노라면 그렇게 지저분할 수가 없다.
온통 나에게 주어진 세상이라고 해서 내 맘대로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지저분한데 뒤에 오는 사람이 보면 얼마나 더 지저분할까?
지저분하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가 남긴 발자국을 이정표로 삼아 눈길을 오고 있다면 나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다.
길을 어지럽혀 놓았으니 말이다.
눈밭마저도 내 맘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큰 복과 행운 앞에서 늘 절제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踏:밟을 답  雪:눈 설  野:들 야  須:모름지기 수  胡:오랑캐 호  亂:어지러울 난(란) 
蹟:자취 적  遂:드디어 수  程:노정 정 ※‘胡亂’은 ‘제멋대로’라는 뜻임

                        金炳基 :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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