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당신을 배신하거든
다니카와(谷川)미곡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영업 시간을 1시간 앞둔 때였다. 이미 사람들의 행렬은 50m를 넘겼다. 일본 시코쿠(四國) 가가와(香川)현에서도 논두렁이 이어진 외진 곳이었다. 대도시에서 기차와 버스를 한 차례씩 갈아타고 1시간 만에 도착했지만, 100여명에게 선수를 빼앗긴 뒤였다. 한 다발에 120엔짜리 우동을 맛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사누키(讚岐·가가와현의 옛 이름)우동'을 먹으면서 이 지역을 빙빙 도는 여행을 '우동 순례'라고 한다. 다니카와미곡점을 비롯해 순례지 우동집은 수백 곳이 넘는다. 한 끼 2~3곳을 돌지 않으면 유명하다는 일명 '전국구 우동'을 섭렵하기 힘들다. 내 경우 두 끼에 5곳을 돌았는데, '한 집에서 두 다발씩 먹지 말고, 한 다발씩 10곳을 맛보는 건데…' 하면서 후회하고 있다.
'우동 순례'를 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주방의 젊은 인력이었다. 제분(製粉)·제면(製麵) 기술을 몸에 익힌 노인이 전방에 버티고, 후방에서 젊은이들이 중노동인 수타(手打) 작업에 땀을 흘렸다. 사누키 순례지는 그렇게 기(技)를 연마한 청년들이 독립해 적자생존의 명멸(明滅)을 거치면서 수백 년 동안 구축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순례 도중 한국에도 사누키에서 기예를 키워 일가를 구축한 우동 명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우리 가족이 사는 도쿄 니시오기쿠보(西荻窪)는 요즘 '라면 신(新)격전지'로 꼽힌다. 두세 평짜리 라면 집이 골목 구석구석에서 성쇠를 거듭하고 있다. 그중 단골집 '다이(大)'의 경우 도쿄 중심가 미타(三田)의 유명 라면집 '지로(二郞)' 족보에 속한다. 여기서 밑바닥 수행을 통과한 청년 3명이 낮 11시 30분부터 심야 1시 30분까지 교대로 주인·주방장·종업원 일을 해낸다.
이 동네가 '격전지'가 된 것은 변두리라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다. 중심가 유명 라면집에서 힘을 키운 청년들이 자기 가게를 열고 데뷔하기에 용이하다. 생존 여부는 다음에 결정된다. 마주한 라면집이라도 한쪽은 수십m 줄이 늘어서고 한쪽은 손님 한 명 찾지 않는 냉혹한 승부처가 도쿄다.
일본에서 라면 집이 급속히 늘어난 것은 최근 10년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라면의 세계에 뛰어든 결과다. 이 시기는 장기 불황으로 나라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못 준 일명 '취업 빙하기'와 겹친다. 덕분에 일본 라면 문화는 사누키우동처럼 10년,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어졌고 세계화됐다.
라면뿐일까. 캐릭터·만화·패션·디자인, 지금 일본 문화의 21세기를 끌어가는 분야도 불황기에 단련됐다. 강력한 도제(徒弟) 시스템의 밑바닥에 뛰어들어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젊은이들이 10년 후 세계를 무대로 커다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요즘도 우리 청년들은 세상이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고 느낄 법하다. 이때 최고의 비빔밥, 최고의 된장찌개, 최고의 냉면, 최고의 캐릭터, 최고의 옷을 꿈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꿈을 이루기 위해 주방이나 공방 청소부터 시작하는 봉행(奉行)의 청춘은 어떤가? 10년 후 세상은 반드시 그들에게 보답하지 않을까.
- 선우정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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