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세상을 바꾼 '평범한 영웅들'/Waple Club

뚜르(Tours) 2009. 5. 9. 11:46

세상을 바꾼 '평범한 영웅들'
 
 

  • 국내 첫 신종 인플루엔자 감염이 확인됐던 A수녀(51)의 지혜로운 행동이 잔잔한 감동을 불렀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속편'이 더 있었다. A수녀가 소속된 수녀원 원장, 그리고 동료 수녀 40명의 '작은 영웅담'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 '평범한 영웅'들의 현명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 세상을 바꿔놓고는 한다.

    #1. A수녀가 멕시코 봉사활동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 오후였다. 목이 좀 붓고 기침이 나왔지만 대수롭진 않았다. 그때까지 A수녀는 신종 플루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A수녀가 멕시코 사태를 안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수녀원에 도착하니 동료 수행자들이 인터넷에서 봤다며 신종 플루 얘기를 해주었다. 순간 짚이는 게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 탔던 택시 운전기사가 계속 기침을 해댔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B원장수녀의 판단은 신속했다. 곧바로 A수녀에게 독방을 쓰도록 조치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막았다. 그날 저녁 미사에서 A수녀는 마스크를 쓴 채 성당 맨 뒤쪽 구석 자리에 따로 앉았다. 다음 날 A수녀는 보건소로 달려갔고 국내 첫 추정 환자 판정을 받았다.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A수녀의 감염 추정 판정이 내려지자마자 동료 수녀·수행자 40명은 수녀원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끊었다. 외부인 방문도 일절 사절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N95 마스크를 쓴 채 생활하고 있다. 완치된 A수녀를 수녀원에 데려다 준 보건당국 관계자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A수녀는 신종 플루 바이러스의 첫 국내 유입 사례였다. 만약 여기서 뚫렸다면 신종 플루는 2차 감염 사태로 번지며 대폭 확산됐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A수녀와 B원장, 그리고 40명 수녀들의 지혜로운 대처가 바이러스의 확산을 1차 저지선에서 막았다.

    #2. 전교조 소속 여교사 L씨의 지난 겨울은 춥고 괴로웠다. 친한 전교조 간부 부탁을 받고 수배 중이던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자기 집에 숨겨준 것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이석행 위원장이 검거되자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허위진술' 강요가 시작됐다. 이들은 L교사에게 "이석행 도피가 민주노총 간부들 요청에 따른 게 아니라고 경찰에 진술하라"고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간부 김씨가 L교사 성폭행을 시도했고, 지도부는 사건을 은폐하려는 듯 보였다.

    심리적 만신창이가 된 L교사가 진실을 폭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노총·전교조의 '조직 보위(保衛)' 논리는 조직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할 때까지 마음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 파장은 컸다. 민주노총의 도덕성은 타격을 입었고, 산하 노조의 탈퇴가 줄을 이었다. 단언컨대 L교사의 폭로가 없었다면 그 후의 민주노총 탈퇴 사태는 없었다. 한 평범한 여교사의 용기가 노동운동의 흐름 자체를 바꾼 것이다.

    #3. 지난해 초여름, '촛불'의 광풍(狂風)은 거셌다. PD수첩의 엉터리 보도를 믿은 많은 국민이 거리로 나왔을 때 "아니다"라며 진실을 외친 것은 26세의 유학 준비생 정지민씨였다. 정씨의 신분은 '번역 감수 아르바이트'에 불과했지만, 진실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정씨가 처음 PD수첩의 오역·왜곡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거대 방송사를 이길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정씨의 문제 제기는 사실로 확인됐고, PD수첩의 왜곡 보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정씨가 아니었다면 PD수첩 사건의 진실은 묻혔거나, 아니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 틀림없다. 온갖 인신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진실을 입증한 26세 정씨의 당찬 용기가 고맙다 못해 눈물이 난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26세 유학 준비생의 진실투쟁이 없었다면? 수치심을 무릅쓴 여교사의 고발과, 소박한 수도자의 삶을 살아가던 40명 수녀들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특출한 엘리트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진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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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정훈·사회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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