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햇살을 받아다 부어도 영 채워지지 않네요

뚜르(Tours) 2009. 7. 25. 09:59

햇살을 받아다 부어도 영 채워지지 않네요

옛날 옛적에 한 나그네가 산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산마루에서 쉬고 있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그네는 풀숲을 헤치고 소리 나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통나무집이 하나 있는데, 여러 명의 일꾼들이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눈부신 햇살 밑에 서 있다가는
쏜살같이 통나무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일꾼이 한 명씩 집 앞에 이르면 문지기가 재빨리 문을 열고, 일꾼은 집 안에 양동이에 담긴(?) 뭔가를 붓고 있었다.
하도 이상하여 나그네는 일을 관장하는 십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아, 우리가 이 집을 지었는데 집안이 어두워 햇빛을 받아다 붓는 중입니다.
며칠 동안 비가 와서 해 구경을 못했는데, 오늘 마침 햇살이 좋잖습니까?
일꾼들이 햇살을 받아다 집 안에 부으면 햇빛이 나가지 못하게 붓자마자 문을 닫지요.
그런데 햇빛이 영 채워지질 않네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기가 막혀 십장에게 “아니, 창문을 내면 될 것 아니오! 그러면 자연히 햇빛이 들 텐데…” 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일러주어도 믿지 않자, 나그네는 직접 나서서 창을 내주었고,
그 덕에 산사람들로부터 귀한 보물을 받아 가지고 하산했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초등학교 때 어느 만화에서 읽은 얘기다.
작자는 기억이 안 나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 가운데 하나다.
이제 만화 속 이야기는 접고,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창문은 분명 문의 일종이다(창문의 준말이 창이다).
그런데 창문이 여타의 문들과 다른 점은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문이든, 대문이든, 쪽문이든 그곳을 통해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지만, 창문으로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것들이 드나든다.

우선 햇빛이 드나들고, 바람이 드나들며, 소리가 드나들고, 향기가 드나든다.
창으로는 인간의 오감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들어온다.
창문을 열면 때로는 파란 하늘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이 화사한 손님의 얼굴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향긋한 꽃내음이 먼 나라 소식처럼 찾아들기도 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구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창문은 “채광이나 통풍을 위하여 벽에 낸 작은 문”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훨씬 넘어서는 역할과 의미를 갖는다.
사람의 갖가지 감정과 밀접한 것이 창문이다.
‘창가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창문을 연다’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 별난 의미를 획득하며 억제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발코니와 창이 없다면 시작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창문이 없으면 사라져가는 연인의 뒷모습도 볼 수 없다.
또한 “南으로 窓을 내겠소”라는 시인의 ‘담담한 선언’은 얼마나 확고한 ‘삶의 의지’를 담고 있는가.

창을 내고 창문을 연다는 의미는 먼 옛날부터 인간에게서 뗄 수 없는 삶의 본질적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창은 사실 닫기보다는 열기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문들과는 달리 ‘열림’에 그 역할이 주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창을 열고 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서울 수도권 건물들에 창문은 많이 설치해놓았지만 없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경우 창을 열 일도 없지만 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도시의 창문들은 모두 실종된 듯하다.

수많은 난개발로 일조권이 마구잡이로 침해된 곳에서는 창문을 열어도 햇살은커녕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다.
만화 속 나그네가 만난 기이한 사람들처럼 햇빛을 받아다 집안에 부어야 할 판이다.

창문을 열면 상쾌한 바람이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공기를 갈기 위해서 창을 연다는 것도 옛날 얘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도심의 대형 건물에서는 공기를 길어다 붓는다.
공기 청정기를 설치해서 공기를 갈고 공기를 공급하니 말이다.
산소를 마시게 해주는 ‘산소방’이 제법 성업한다는 것과 공기를 길어다 붓는다는 메타포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

이제 창을 열어도 들어오는 것은 바람에 날린 분진과,
향기가 아닌 악취와, 청량한 소리가 아닌 옆 동네 재건축 현장의 소음뿐이다.
그보다 더 큰 상실은 ‘창문을 여는 감동’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난개발과 재개발 열풍 속 이 나라 도시가 우리에게 가져온 야만이다.
그 야만은 우리로 하여금 열림 없는 닫힘을 행하게 하기 바쁘다.

 

                       김용석 지음 <일상의 발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