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의 후회
8일 본지 여론면에 실린 프로 골퍼 박세리 선수의 에세이를 읽은 기자는 가슴이 아렸다. 바로 6일 전에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대회가 열리는 미 앨라배마주의 프랫빌에서 그로부터 들었던 회한(悔恨)이 에세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오직 승리만을 향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독일 전차'처럼 달려왔던 것 같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잠자고 밥 먹는 것 외에는 오로지 공만 치는 단조로운 생활에 스스로 숨이 막혔다."
박세리 선수는 에세이에서 "나는 연습밖에 모르는 벌레였다"고 말하고 "골프 밖의 세상에 대해 유치원생"이라고 했다. "나는 옳게 살아온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요즘도 승부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세리 키즈'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도 했다.
박세리 선수는 지난 2일 나비스타 LPGA 대회 중에 개최된 한국·미국·호주 선수들과의 좌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당시 박 선수의 발언을 메모한 취재수첩에 기자가 형광펜으로 줄을 쳐 놓은 것은 이런 구절이다. "한국 선수들에게는 자기 생활이 없어요. 골프에만 목숨 걸듯이 살고 있거든요. 아직 어린 선수들, 갈 길이 먼데…. 나도 그러질 못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지만, 최대한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즐기면서 해야 해요." 그는 까마득한 후배인 박인비 선수가 "쉴 때는 가끔 영화를 본다"고 하자, "와, 영화를 본 지 100년은 된 것 같다"고 했다. 올해 32세인 그녀가 영화를 본 것이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된 것 같다"고 할 때, 여유 없이 살아온 그의 인생에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시야(視野)를 잠깐만 돌려보자. 박세리 선수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과연 골프계에만 해당되는 말일까. 지금 한국 사회의 어린 학생들은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누구나 박세리 선수가 걸었던 경로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에 3~4년 파견 나왔다가 귀국하는 주재원들은 귀국 날짜가 다가오면 자녀 교육에 대한 걱정으로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환송회 자리에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 걱정이 나온다. "아이들은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군요. 귀국하면 언제 미국에 있을 때처럼 여유 있게 지내겠어요."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에서는 프로 골퍼 지망생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지내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을 하든 즐기면서 그 원리를 이해하며 해야 하는데 학원으로, 운동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눈에 이런 한국이 정상으로 비칠 리가 없다. 한국에 4년간 주재하다가 최근 워싱턴 DC로 옮긴 파이낸셜 타임스의 애나 파이필드(Fifield) 특파원은 서울의 평창동에 살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 주변의 학생들이 방과후 곧장 학원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모국인 뉴질랜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면 놀러다녀야지 도대체 왜 밤늦게까지 여러 학원에 가야 하느냐"고 말할 때는 그의 목소리가 반(半)옥타브는 올라가 있었다.
한국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숱하게 수학 올림피아드를 비롯한 국제대회에서 곧잘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석·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그 경쟁력이 유지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쳇바퀴 돌듯 학교 수업이 끝난 후 학원이나 연습장으로 직행하는 한국 아이들의 미래(未來)에 대해 박세리 선수가 말하고 있다. 아이들이 즐겁게, 여유 있게 공부나 운동을 하도록 하지 않으면 반짝하고 빛날지 모르지만, 절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 이하원·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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