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김연아의 힘

뚜르(Tours) 2009. 10. 19. 13:58

김연아의 힘

 

1894년 무렵 경복궁 연못에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참석한 가운데 주한 외국인들의 스케이트 모임이 열렸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 기행가 비숍 여사는 이날 풍경을 '조선과 이웃나라'에서 전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내외의 법도 때문에 향원정에 발을 드리워 바깥에선 안 보이게 하고 안에서 관람했다고 한다. 황후는 난생처음 보는 놀이에 흥겨워하면서도 남녀가 사당패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양을 보고는 망측해했다.


▶ 당시는 스케이팅을 '발로 얼음을 지치는 놀이'라는 뜻에서 빙족희(氷足戲)라고 불렀다. 우리보다 30년쯤 앞서 스케이트가 전해진 일본에선 스케이트를 '얼음 놀이'(戲遊)라고 했다. "남녀가 손을 잡았다 놓았다 했다"는 걸 보면 명성황후가 보았던 스케이팅 중엔 피겨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피겨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24년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FSC)가 생겨난 이후다. 그나마 8명의 창립 회원 중에 여성은 없었다('한국 피겨스케이팅 100년').

 

 

 

▶ 피겨는 1864년 미국 발레 교사 잭슨 헤인즈가 스케이트로 왈츠를 춘 것이 효시라고 한다. 피겨 안무가 니콜라이 모르조프는 "피겨는 시(詩)와 같다"고 했다. 활자의 나열이 시가 아니듯, 회전·점프의 기교만을 피겨라 할 수는 없다. 선수가 음악에 몰입하고 그 혼신의 몰입이 표정과 몸짓으로 나타나 관중의 마음을 움직일 때 피겨는 완성된다.


▶ '피겨퀸' 김연아가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1차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역대 최고 점수로 우승했다. 김연아의 우승은 피나는 연습에서 나오는 기술이 바탕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대 무기는 역시 풍부한 감성과 표정 연기다. 깜찍하고 장난기 어린 몸짓, 카리스마 가득한 눈빛, 때론 냉정하고 때론 위엄 가득한 표정을 짓는 데 따라 관객은 가슴을 풀었다 조였다 한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김연아는 '록산느의 탱고'를 추면서 경기장의 공기까지 탱고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 사람들의 너무 많은 기대가 19세 소녀에겐 부담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걸 이겨내고, 실수를 하면 오히려 만회하는 정신력이 김연아의 또 다른 힘이다. 라이벌 아사다 마오와의 이번 대회 점수 차는 36.04. 이제 김연아의 라이벌은 김연아 자신이다. 피겨의 변방에서 태어나 세계의 스타로 자리 잡은 김연아가 넉 달 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또 한 번 기쁜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한다.

 
  •   -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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