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원칙과 변용(變容)

뚜르(Tours) 2010. 4. 15. 21:23

지금 한국에서는 라디오, TV, 인터넷 할 것 없이 모든 매스컴은 백령도라는 신성한 이름이 붙은 섬 근처에서 일어난 1,200 톤급 군함의 침몰 사건을 놓고 그야말로 미주알고주알로 일이 터진지  이 주를 넘었어도 아직도 온갖 의문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46명이라는 적지 않은 해군병사들의 실종과 군함의 침몰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언제쯤  속 시원한 결론이 날지는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게 벌써 이 주일이 지나고 있다.
이젠 선체를 인양하여 면밀히 검사를 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어쩌면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생각할 지도 모른다.
 
실종 병사가족들의 애타는 절규와 기도에도 불구하고 침몰 해역의 기상 악화와 여의치 못한 여러 가지 여건의  미비로 실종병사들은 단 한 사람도 구조되었다는 희보를 접하지 못하고 있다.
함수, 함미 쌍방에 목숨을 건 잠수병들의 노력으로 출입구를 확보하고 진입을 하였다고는 한다지만 과연 그들의 목숨을 건 사투에 걸맞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기 힘든 형편이다.
우방 미국의 함대와 잠수 전문가들이 도착했지만 그들은 잠수 규정 위반을 내 세워 어떠한 노력도 하려고 들지 않는다.
 
초동 대응부터 미진한 정부의 대책으로  실종 선박의 위치와  실종 병사들의 생명은 기상 악화로 인한 잠수 불능의 사태로 인하여 진척 없이 여드레가 지나갔고,겨우 선체를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 위치를 추적했으며, 부표를 띠우는데 그치고  나날이 기상상태를  빌미삼아 진척 없는 나날을 보내기에 이르자, 자진하여 나선 한 준위의  사망으로 정부가 겨우 체면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만일 한주호 준위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몸소 실천한 그의 군인정신이 아니었다면  정부는 조여드는 야당과 피가 마르는 실종병사들의 가족의 압력에 갈 곳을 찾지 못할 뻔하였다.
 
미국에서 급파한 잠수전문가들은 규정을 내 세우며 잠수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유속 1노트, 수온 10도라는 절대적인 규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잠수부들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하는 철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런 규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동료들을 살리기 위하여서는 목숨이라도 내 놓겠다는 심정으로 물에 뛰어들었다.
미국인들의 규정과 한국인들의 생떼 사이를 오고가며 한준위가 사망하였고,  실종 가족들은 스스로 그들의 생명을 건 무리한 잠수에 희망을 걸어 보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며칠의 사투 끝에 얻어낸 남 상사의 주검은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을 돌려 세워 구조작업 중지라는 결정을 내렸다.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
거기서 필자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비추는  한 오라기의 서광을 보았다.
그것은 생떼에서 벗어나 원칙을 준수하려는  한국인들의 전향이기 때문이다.
   
생떼는 생떼거리라고도 하며 당치도 않은 일을  억지로 하려는 고집을 이르는 말이다.
6 노트에 가까운 물의 속도, 영상 1도가 될까 말까 하는 수온, 35 미터보다 깊은 해수면에는 중장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중장비 없이 46미터를  오르내린 일,  시야 5미터는커녕 30cm 밖에 안 되는 죽음의 해구(海溝)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드나드는 일은 미국인들이 볼 때에는 생떼도 그런 생떼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들이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우리 한민족은 이해하고,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대접은커녕 영웅으로 대접한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오늘날이 그런 생떼 때문에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죽기 아니면 뻗기라고 한다.
급하면 목을 내밀며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민족, 독일 간호원으로 가서 하루 종일 죽은 시체를 닦는 그 저력, 1,000미터의 지하 갱 속에 들어가서 아리랑을 부르며 대학 수강료가 아깝다고  탄식하며 죽도록 일하는 강인한 민족성이 바로 아직은, 훨씬 많이 더 가야하지만 일본의 소니를 꺾어치우는 데까지 왔다.
다른 백성들이 찬탄(讚歎)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주호 준위의 우국충정, 이명박 대통령이  보국훈장 광복장을 이미 수여한 것을  충무 무공훈장으로 갈아치우는 엄청난  용기가 우리를 오늘날 보릿고개를  잊어버린  민족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빈대, 벼룩, 이를 죽이기 위하여 DDT하얀 가루를 흠뻑 뒤집어쓰고, 구충제를 먹고 "몽땅 빠집니다요"라는 팻말을 가슴팍 앞에 달고 다니던 우리가 아닌가?
반세기도 채 되지 않아 이룬 위대한 한강의 기적은 바로 이 생떼의 산물이다.
 
이젠 규정을 지킬 때도 되었고, 생떼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규정을 지키는 것은 우리들을 위하여서다.
잠수하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남의 아들들을 배려할 줄도 알아서 내 아들 살리기 위하여 죽더라도 잠수하라고 부르짖어서는 안 된다.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옳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규정을 지키는 백성들이 이긴다.
 
한준위의 죽음은 바로 생떼에서 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수여한 충무 무공훈장도 일종의 규정 위반이다. 
법을 지키고, 규정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바로 조국을 바로 지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위급하고 바쁘더라도 규정을 지킬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일에 대처한다면 결코 다음에는 당황하거나 생떼를 부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필자는 믿는다.
 
쌍끌이를 하던  금양 98호가 캄보디아  선적의 1,400톤급 상선과  충돌 되어 침몰하였다고 한다.
고깃배 한척과 아홉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그것이 다 생떼식 사고에서 시작된 결과다.
무리는 무리를 낳는다.
한 개의 규정 위반이 열개를 허용해야 하고 백 개의 규정 위반을 만든다.
무리한 일로 시작된 작은 무리수가 백의 무리수를 낳아 무리의 연속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원칙을 중요시하고 무리한 생떼를  주장하거나, 영웅이 되기 위하여 생명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결국 무리를 가한 것은 그만큼의 규정위반의 대가를 치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술에 있어서 작은 파격(破格)이 멋이 될 수 있다고 어떤 이가 말하였지만,
우리 일상사에 있어서 더구나 국방이나 정치에 있어서의 파격은 변용(變容)이라는 이름으로 비상위기에서만 신중히 고려되어야한다.
그러나 변용은 여전히 원칙보다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쌍끌이 금양호의 침몰로 발견된 두 시신을 모신 위패 앞에도 훈장은 놓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형평에 맞는 것 같은 생각은 바로 생떼라는 무리 수 위에 꽃피는 인정이 아니겠는가?
원칙은 원칙으로 남아 준수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무시한 원칙으로 말미암아  변용이 가져 올 또 다룬 무리를 단절시키기 위한 바른 노력이기 때문이다.     
 
                           김훈묵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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