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그 뒤안길

여성최초 14좌 완등] 세상 꼭대기에 올라… 고미영, 너를 보낸다

뚜르(Tours) 2010. 4. 28. 15:10

여성최초 14좌 완등] 세상 꼭대기에 올라… 고미영, 너를 보낸다


"미영아, 너의 무덤 앞에서 내가 약속했잖아 꼭 너와 함께 오른다고…
보고 있니? 난 가슴에 네 사진을 품고 왔어
이 산, 이 하얀 눈 속에 너의 사진, 묻어두고 간다"27일 해발 8091m의 안나푸르나 봉(峯)을 오르는 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기온은 영하 30도에 초속 12m의 강풍까지 몰아쳤다. 해발 8000m부터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이번에도 무산소 등정을 고집한 오 대장은 "이대로 포기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힘겨워 보였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꿈을 이룬 오은선 대장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해 숨진 후배 산악인 고미영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27일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오대장은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에 겨운 듯 눈물을 쏟았다. 오 대장은“기쁨을 대한민국 국민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고미영의 사진을 정상에 묻고 내려왔다. /KBS 제공

그러나 오은선 대장은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품 속에는 한 살 적은 후배 산악인 고미영씨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둘은 히말라야 8000m 이상의 고봉 14좌(座) 완등을 놓고 경쟁하던 라이벌이었고, 든든한 동반자였다. 그랬던 고씨가 지난해 7월 낭가파르바트 하산 도중 발을 헛디뎌 추락사했다. "경쟁에만 파묻히지 말고 손잡고 안나푸르나에 오르자"던 그들이었다. 오 대장은 안나푸르나 등정에 나서기 전 전북 부안의 고미영씨 묘소를 찾아, "여성 최초의 14좌 완등 꿈을 꼭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13좌에 오른 경쟁자 에드루네 파사반(스페인)이 내달 초 시샤팡마(8027m) 도전을 예고한 상태였다.

함께 껴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2008년의 오은선(왼쪽)과 고미영. /정정현 기자

전날 캠프2에서 캠프3으로 오르던 중 발생한 눈사태로 아찔한 위기를 넘긴 오 대장은 이날도 한계 상황을 딛고 13시간 15분간 악전고투한 끝에 등정에 성공했다. 불교신자인 오 대장은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등정을 허락해 준 안나푸르나 여신(女神)에게 감사하는 눈물이었을까.

지난 1997년 7월 가셔브롬II (8035m)에 오른 이후 12년 9개월 만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이었다. 오 대장은 14좌를 완등한 20번째 인물이자, 세계 최초의 여성이 됐다. 오 대장은 안나푸르나 정상의 만년설 속에 고미영의 사진을 묻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