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중도 하산하는 내 인생

뚜르(Tours) 2011. 10. 30. 08:27

   산이라면 북한산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내가 감히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설악산의 요행 탓이었다.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다고 지난봄 동료들 따라 엉겁결에 설악산 대청봉에서 인증샷을 찍고 내려온 것이 화근이었다. 
웬걸, 지리산은 설악산이 아니었다. 
설악산이 야한 자태로 남자를 홀리는 농염한 여인이라면 지리산은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정숙한 여인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지루하게 반복될 뿐 도대체 마음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하천 지나 벽소령에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천왕봉 낙오자, 벽소령의 루저(loser)가 됐다.

 루저의 하산길은 쓸쓸하고 참담했다. 
벽소령에서 함양의 정음 마을로 이어지는 6.4㎞의 임도(林道)를 타박타박 걸어 내려오며 자신을 돌아봤다. 
운동과 담을 쌓고, 금연과 절주 약속도 못 지키면서 천왕봉을 노린 무모함에 낯이 뜨거웠다. 
체력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극복하지 못한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오르락내리락하다 정상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중도 하산하고 마는 것이 내 인생이라면 그건 운명이 아니라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란 생각도 들었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부패를 규탄하는 루저들의 함성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다. 
한 달 전 월가(街)에서 시작된 ‘점령하라(Occupy)’ 시위가 전 세계로 번져 15일 80여 개국 1500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1%의 위너(winner)가 판돈을 싹쓸이하는 카지노식 금융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을 참다 못한 99%의 루저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학위와 스펙을 갖추고도 취업을 못한 젊은이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소외감은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 
난파선을 침몰 위기에서 구하려면 무거운 것부터 바다에 던져야 하지만 1%의 부자들은 무거운 금덩이를 끌어안고 젊은이와 약자들을 바다로 차버리고 있는 형국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의 성공 스토리는 닮았다”면서 교육과 근면을 그 요인으로 꼽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 
우리 국민의 73%가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노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고, 편법과 배경이 필요하다고 본다는 것 아닌가. 
가진 자들이 나눔의 정신을 발휘하고, 패자부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지리산 루저는 제 탓을 하면 그만이지만 이 사회의 루저들은 제 탓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어법을 쓸 생각은 없지만 루저가 되어 보니 루저도 100%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루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지리산의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루저는 싫다. 
언젠가는 나도 지리산의 속살을 꼭 보고 싶다.

                     

 

 배명복 /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