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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위령의 날) 위령의 날은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로 들 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 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말씀의 초대 욥은 친구들의 몰이해 속에 고통을 겪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아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 계신 주님을 깨닫고 구원자이신 그분을 뵙기를 갈망한다(제1독서).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의 근거이다. 신앙인은 이루어질 구원의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희망 하는 바를 믿는 것은 이미 삶 속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제2독서). 우리 삶 속에는 참된 행복이 숨어 있다. 가난해도, 슬픔 속에서도, 때로는 온갖 박 해와 고통 속에서도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은 그 안에 있다. 그 행복을 깨닫 고 사는 사람은 하늘 나라를 이미 사는 사람이다(복음). 제1독서 욥이 말을 받았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 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 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 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1.23-27) 제2독서 형제 여러분,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 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 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 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 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기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 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외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 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 니다.(로마 5,5-11)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 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 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오늘의 묵상 저울에 행복을 달면 /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 불행 49% 행복 51%면 /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 ....... // 단 1%가 우리를 행 복하게 / 또 불행하게 합니다. / 나는 오늘 그 1%를 / 행복의 저울 쪽에 올 려놓았습니다. /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행복 하다고..... 이해인 수녀님의 "1%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행복 과 불행은 내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온전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말 못할 슬픔이 잠겨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보이 지 않는 희열과 행복이 감추어 있습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기울여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는 신앙인은 늘 성 (聖)과 속(俗)의 경계를 걷는 사람입니다. 1%의 차이가 우리의 모습을 다르 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은 성과 속의 저울 양편에 놓인 우리 마음처럼 1% 만 더 주님께 관심을 기울여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가난해도, 슬퍼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 사이 에서 1%의 마음 기울기에 달려 있습니다.(매일미사에서 전재) --------- ------ ------------------------------------------------- 오늘의 기도 "주님,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고, 성자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저희의 믿음을 깊게 하셨으니, 저희도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하는 굳건한 희망을 지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1.11.02 Martinus
오늘의 묵상(위령의 날) 위령의 날은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로 들 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 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말씀의 초대 욥은 친구들의 몰이해 속에 고통을 겪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아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 계신 주님을 깨닫고 구원자이신 그분을 뵙기를 갈망한다(제1독서).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의 근거이다. 신앙인은 이루어질 구원의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희망 하는 바를 믿는 것은 이미 삶 속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제2독서). 우리 삶 속에는 참된 행복이 숨어 있다. 가난해도, 슬픔 속에서도, 때로는 온갖 박 해와 고통 속에서도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은 그 안에 있다. 그 행복을 깨닫 고 사는 사람은 하늘 나라를 이미 사는 사람이다(복음). 제1독서 욥이 말을 받았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 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 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 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1.23-27) 제2독서 형제 여러분,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 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 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 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 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기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 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외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 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 니다.(로마 5,5-11)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 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 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오늘의 묵상 저울에 행복을 달면 /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 불행 49% 행복 51%면 /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 ....... // 단 1%가 우리를 행 복하게 / 또 불행하게 합니다. / 나는 오늘 그 1%를 / 행복의 저울 쪽에 올 려놓았습니다. /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행복 하다고..... 이해인 수녀님의 "1%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행복 과 불행은 내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온전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말 못할 슬픔이 잠겨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보이 지 않는 희열과 행복이 감추어 있습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기울여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는 신앙인은 늘 성 (聖)과 속(俗)의 경계를 걷는 사람입니다. 1%의 차이가 우리의 모습을 다르 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은 성과 속의 저울 양편에 놓인 우리 마음처럼 1% 만 더 주님께 관심을 기울여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가난해도, 슬퍼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 사이 에서 1%의 마음 기울기에 달려 있습니다.(매일미사에서 전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