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샘물

Cardinal Stephen Kim 발자취

뚜르(Tours) 2012. 11. 24. 23:01
Cardinal Stephen Kim 발자취



Cardinal Stephen Kim 발자취

“신앙의 뿌리 순교자”

[가난했던 소년 시절]

1922년 6월3일(음력5월8일),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의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수환은 유아 세례를 받고 부모와 형제들의 보살핌 속에서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는 일찍부터 성소를 받는 아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신앙과 사랑으로 자식들을 가르치신 분들이셨다.

바로 이러한 소망의 결실을 부모들에게 안겨준 아들이 넷째인 김동환(가롤로)과 막내인 김수환이었다.

광산 김씨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김수환의 조부 김보현(요한)때부터였다. 박해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끝내 형벌 가운데서도 신앙을 증거하다가 감옥에서 아사로 순교하셨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인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부친 영석을 낳게 되었다.

부친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웠으므로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잦은 이주는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다. 김수환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다시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한편, 공소를 맡아 지방 전교의 바탕을 마련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학업의 길]

이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의 희생과 사랑 덕택으로 김수환과 형 동환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김수환은 1학년 때 부친을 여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그는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여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다음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였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해 4월에는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사실 그 무렵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 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1944년 들어 모든 상황이 일변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되어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이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구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다음 해 초에 서울의 성신대학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시골사제에서 추기경으로”

[주교 성성]

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 본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혜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려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1년 8개월을 활동하는 동안 김 신부는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가톨릭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1966년 2월15일, 44세의 김 신부는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31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이때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가 바로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추기경 서임]

김 주교는 이후 초대 교구장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 쇄신 정신에 따라 교구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한국 주교회의 부의장과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한국 부대표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67년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대주교가 사임하면서 다음 해 4월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어 5월29일 명동대성당에사 착좌식을 가졌다. 그리고 1969년 3월28일, 김 대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30일 로마에서 “성 펠릭스 성당” 명의의 서임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 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서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 대학교, 대만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 철학, 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에 추기경은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실천하는 신앙인”

[복음화 운동]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젋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그는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과 불확실한 노동 문제 등에 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1968년 말에 48개 본당 14만여 명이던 것이 1997년 말에는 197개 본당 121만여명을 기록하게 되었고, 성직자수는 59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순교자들의 현양과 시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1984년 5월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한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와 함께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표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의 교류 활동, 1989년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정착시키는데 앞장섰다. 특히 세계 성체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 한몸 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교회 안팎으로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소외된 이들의 벗]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교리를 통해 그는 모든 사회 구조나 정치 형태가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며, 동시에 평등한 권익을 보장하고, 특권 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스스로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내면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교회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실천과정에서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교리의 실천으로 그는 1970년대의 유신 체제 이래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구국과 정의 회복을 위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였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 권력으로부터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오기도 하였지만, 대내외적으로 천주교회의지위가 크게 격상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또한 언제나 김 추기경의 벗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만났고, 강제 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빈민들을 방문하였으며,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천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1987년 4월28일에는 ‘도시 빈민 사목 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하였다. 이에 힘입어 지난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은 150여개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격동기에 처한 한국 사회 안에서 기본적인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심의 대변자로서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아울러 교회 안으로는 정신적 지주로서 쇄신을 통한 복음화를 바탕으로 제3세기로 나아가는 발판을 다져 놓았다. 그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실천해 온 신앙인이었다.

Cardinal Stephen Kim 발자취

“신앙의 뿌리 순교자”

[가난했던 소년 시절]

1922년 6월3일(음력5월8일),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의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수환은 유아 세례를 받고 부모와 형제들의 보살핌 속에서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는 일찍부터 성소를 받는 아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신앙과 사랑으로 자식들을 가르치신 분들이셨다.

바로 이러한 소망의 결실을 부모들에게 안겨준 아들이 넷째인 김동환(가롤로)과 막내인 김수환이었다.

광산 김씨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김수환의 조부 김보현(요한)때부터였다. 박해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끝내 형벌 가운데서도 신앙을 증거하다가 감옥에서 아사로 순교하셨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인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부친 영석을 낳게 되었다.

부친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웠으므로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잦은 이주는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다. 김수환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다시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한편, 공소를 맡아 지방 전교의 바탕을 마련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학업의 길]

이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의 희생과 사랑 덕택으로 김수환과 형 동환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김수환은 1학년 때 부친을 여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그는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여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다음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였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해 4월에는 일본 동경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사실 그 무렵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 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1944년 들어 모든 상황이 일변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되어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이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구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다음 해 초에 서울의 성신대학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시골사제에서 추기경으로”

[주교 성성]

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 본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혜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려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1년 8개월을 활동하는 동안 김 신부는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가톨릭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1966년 2월15일, 44세의 김 신부는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31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이때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가 바로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추기경 서임]

김 주교는 이후 초대 교구장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 쇄신 정신에 따라 교구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한국 주교회의 부의장과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한국 부대표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67년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대주교가 사임하면서 다음 해 4월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어 5월29일 명동대성당에사 착좌식을 가졌다. 그리고 1969년 3월28일, 김 대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30일 로마에서 “성 펠릭스 성당” 명의의 서임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 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서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 대학교, 대만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 철학, 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에 추기경은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실천하는 신앙인”

[복음화 운동]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젋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그는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과 불확실한 노동 문제 등에 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동안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1968년 말에 48개 본당 14만여 명이던 것이 1997년 말에는 197개 본당 121만여명을 기록하게 되었고, 성직자수는 59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순교자들의 현양과 시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1984년 5월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한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와 함께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표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의 교류 활동, 1989년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정착시키는데 앞장섰다. 특히 세계 성체 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 한몸 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교회 안팎으로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소외된 이들의 벗]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교리를 통해 그는 모든 사회 구조나 정치 형태가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며, 동시에 평등한 권익을 보장하고, 특권 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스스로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내면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교회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실천과정에서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교리의 실천으로 그는 1970년대의 유신 체제 이래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구국과 정의 회복을 위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였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 권력으로부터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오기도 하였지만, 대내외적으로 천주교회의지위가 크게 격상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또한 언제나 김 추기경의 벗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장애인과 사형수들을 만났고, 강제 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빈민들을 방문하였으며,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천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1987년 4월28일에는 ‘도시 빈민 사목 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하였다. 이에 힘입어 지난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은 150여개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격동기에 처한 한국 사회 안에서 기본적인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심의 대변자로서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아울러 교회 안으로는 정신적 지주로서 쇄신을 통한 복음화를 바탕으로 제3세기로 나아가는 발판을 다져 놓았다. 그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실천해 온 신앙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