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민 스님의 에세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발간 7개월 만에 출고 기준 판매량 100만 부를 넘어서며 『안철수의 생각』도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로 재등극했다.
그런데 멈추면 뭔가 보이긴 할 것 같은데 정작 그 멈추는 게 가장 힘든 것 아닌가 싶다.
실제로 나이 들어 갈수록 제일 어려운 게 뭔가 곰곰 생각해 보니 멈추고 그치는 일이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을 멈추기가 어렵고, 늘 하던 버릇을 그치기도 쉽지 않다.
한번 재미본 일이라 멈추고 그치지 못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경우도 적잖고 신세 망친 사례도 허다하다.
이쯤에선 멈춰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선을 지나쳐 패가망신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 도대체 왜 이렇게 멈추지 못하고 그치지 못하는 것일까?
학교에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은 배웠는지 모르지만, 정작 브레이크 밟는 법을 배운 기억은 별반 없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도 나가는 일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 멈추고 그치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해서 멈출 때 멈추고 그칠 때 그칠 줄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고로 큰 지혜는 멈춤을 알고, 작은 지식은 계략을 안다 했다.
멈출 때 멈출 줄 아는 것은 정말 큰 지혜다.
문중자(文中子)라 불리던 중국 수나라 시절의 인물 왕통(王通)은 멈춤(止)과 멈추지 않음(不止) 사이가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이자 큰 일을 이루는 자와 용렬한 자의 경계라고 갈파했다.
문중자 왕통은 노장(老莊)사상에 뿌리를 두면서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설파한 특이한 인물이다.
공맹의 일차적 가르침이 나아감과 채움의 원리라면
노장의 핵심적 가르침은 멈춤과 비움이다.
물론 나아가지 않는 이에게 멈춤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나아감만 있고 멈춤이 없다면 그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일과 다름없다.
# 우리는 정말이지 멈출 줄 모르는 족속이다.
초고속 산업화와 고도성장기를 지나오면서 오로지 전진 또 전진해 왔다.
멈춤은 우리 시대에 대한 배반처럼 여겨졌었다.
그래서인지 멈출 수 없고 그칠 수 없음은 우리 안에 유전인자처럼 각인되고 말았다.
멈춰보고 그쳐본 경험이 없었기에 멈춤과 그침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화했는지도 모른다.
멈춘다는 것은 지난 60여 년간 패배의 동의어였다.
멈춤 없이, 그침 없이 “그 사람 잘나간다, 그 회사 잘나간다”는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공을 의미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 흔히 말하길 “잘나갈 때 잘해라”라고 말한다.
물론 옳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칠 때 그치고 멈출 때 멈추라”는 더 중요한 말이다.
한마디로 생과 사를 가름할 만한 말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옛 어른들도 멈추고 그치는 일의 중요함과 그 지극한 어려움을 모르지 않았기에 ‘지지당(知止堂)’이란 호를 지닌 이가 적잖았다.
말 그대로 멈춤을 알고 그침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고 스스로 물러났다가 중종반정이 있은 후 다시 조정에 들어갔던 청백리 송흠(宋欽, 1459~1547)의 호가 지지당이었다.
역시 연산군 시절에 벼슬하지 않고 감악산에 들어가 은둔했던 남포(南褒, 1489~1570) 또한 지지당을 호로 썼다.
그는 권신 남곤의 형이었으나 권세에 물들지 않고 깨끗이 살아 당대와 후세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 비단 우리의 옛 선비만이 아니다.
아시아 최고 갑부 리카싱도 “멈춤을 안다”는 뜻의 한자어 ‘지지(知止)’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늘 이것을 마음에 새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난세일수록 멈춤의 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인 듯싶다.
문중자 왕통이 ‘멈춤과 그침의 학’ 즉 지학(止學)을 천명했던 중국 수나라 시대는 분열 끝에 통일은 이뤘지만 여전히 세월은 난세 중의 난세였다.
우리 조선의 연산군 시절 역시 난세 중의 난세 아니었던가.
자고로 난세에는 멈출 줄 알고 그칠 줄 아는 것이 지혜의 으뜸이요 삶의 비책인 셈이다.
정진홍 /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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