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사년 새해부터 다시 일기를 쓴다.
오늘이 음력 초이레이니 작심삼일은 일단 넘긴 셈이다.
물론 이전에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밀린 일기를 쓰느라 애먹었던 기억은 차치하고라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마칠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꽤 꾸준히 일기를 쓴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곳저곳 여행할 때마다 쓴 기행일기도 여럿 있긴 했다.
하지만 새삼 일기를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설 연휴에 읽은 『일기로 본 조선』이란 책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쓴 12편의 서로 다른 내용과 형식의 오래된 일기의 편린들을 접하면서 문득 나도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다시 일기 쓰기를 작심하고 나니 일기와 관련해 몇 가지 책들이 떠올랐다.
하나는 구한말 의료선교사였던 이가 쓴 『알렌의 일기』다.
이것은 일기를 넘어 우리 근대 역사의 중요한 사료에 다름 아니다.
산파였던 마서 무어 밸러드가 1785년부터 1812년 77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27년간 썼던 『산파일기』도 그 자체로 생활사의 걸작이다.
이 일기에 따르면 그녀는 816명의 아이를 받아냈다.
그녀 스스로도 아홉 자녀를 낳았고 그중 셋이 어릴 때 죽었다.
일기 그 자체가 인생을 웅변하는 것 같다. 아니 일기가 곧 역사였다.
# 그런가 하면 고은 시인이 쓴 『바람의 사상』이란 제목의 책은 그가 지난 1973년 4월 6일부터 77년 4월 11일까지 썼던 일기를 묶은 것이었다.
노벨문학상을 탈지도 모를 대문호의 일기라서 대단한 문장과 문필의 집성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의 일기는 다분히 파편적인 단상과 일상의 시시콜콜한 사건들의 나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한 켜 한 켜 쌓여 일상의 파편적인 것들이 씨줄 날줄로 엮여 부지불식간에 삶의 동아줄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스쳐 지나갈 바람 같은 생각들이 일기라는 삶의 틈새 사이에서 어느새 감히 하나의 사상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거칠게나마 형성하고 있었다.
시인이 자신의 일기 모음을 ‘바람의 사상’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더구나 시인이 책 첫머리에 “우연은 엷고 필연은 짙다”고 적은 아리송한 말의 속뜻도 헤아려졌다.
매일매일의 우연한 사건들과 파편 같은 말들일지라도 그것들이 모이고 쌓이면 동아줄 같은 필연의 세계와 사상의 그루터기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음이리라.
# 물론, 일기라고 해서 반드시 종이노트에 펜으로 적어야 할 이유는 없다.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문자 보내듯 나 자신에게 써서 보내도 그만이다.
앱 시장에 들어가 보니 아예 일기장 애플리케이션도 여러 가지가 제공되고 있었다.
그것도 무료로!
하지만 나는 이제껏 써오던 노트 앱에 그냥 ‘일기’ 항목을 추가해 적어가기로 했다.
자고로 글은 여기저기 흩어놓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두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일기가 꼭 글이어야만 할 이유도 없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사진에 담아 남겨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 밑에 몇 마디 토를 달아도 좋다.
그것이 쌓이면 아주 근사한 자기만의 기록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일기만은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고 싶다면 그 또한 좋은 거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손맛’이란 게 있지 않은가.
# 일기의 힘은 지속하는 데 있다.
우리는 지나온 생에 대한 연민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날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일기를 쓴다.
일기는 단지 매일매일 뭔가를 기록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자기 삶에 대한 담담한 애정이며 절절한 생의 소통이다.
안팎으로 위기다.
우리 일기를 쓰자.
그래서 이 역사와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자기 삶에 대한 증인이 되자.
북핵 위기 속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적는 일기는 물론 그 자체로 역사다.
하지만 평범한 생활인일지라도 일기를 쓰는 것은 스스로의 생을 견디게 하고 촛불처럼 흔들리는 삶을 붙들어 주리라.
<정진홍의 소프트파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