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샘물

[손희송 주교] 신중하고 겸손하지만 유머 감각 갖춘 ‘소통의 달인’

뚜르(Tours) 2016. 4. 14. 09:34

연천공소 회장 5남매 중 막내



▲ 첫영성체 후 기념사진.



▲ 1958년 오붓하게 찍은 가족 사진. 당시 43세인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막내가 손 주교.



▲ 1986년 사제 수품 후 어머니에게 첫 축복을 하고 있다.



▲ 1987년 교황 알현 행사 중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손 주교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다.



▲ 서울 용산본당 주임 시절, 축일 축하 케이크에 뒤범벅돼 호탕하게 웃고 있다


“판단력이 뛰어나고 신중하다. 겸손하고 점잖다. 소통을 잘한다.”


손희송 주교와 인연이 있는 이들의 눈에 비친 손 주교의 모습이다. 손 주교의 큰 누나 손희복(엘리사벳, 72)씨는 “어린 시절부터 막내답지 않게 의젓하고,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대신학교 입학 동기로 ‘30년 지기’인 박일(동성고 교장) 신부는 “신학교에서 딱딱한 교의신학을 가르쳤지만 고지식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제자들과 소통을 잘했다”면서 “SNS 등으로 젊은이들과도 지속해서 소통을 한 ‘소통의 달인’”이라고 말했다.


손 주교는 1957년 1월 경기 연천의 독실한 구교우(舊敎友) 집안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연천공소 회장이었던 손 주교의 아버지 손광호(마태오, 1970년 선종)씨는 손 주교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기도부터 가르쳤다. 손 주교의 가족에게 기도는 ‘의무’였다. 매일 온 가족이 모여 기도를 바쳤다. 할아버지 손순재(프란치스코)씨는 손주들이 기도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손 주교가 어렸을 때부터 틈만 나면 “너는 신부가 돼라”고 이야기했고, 손 주교는 자연스럽게 성소를 키웠다. 아들의 신앙을 이끌어주던 아버지는 어느 날 여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손 주교가 14살 되던 해였다. 어머니 양기순(마리아, 2014년 선종) 씨는 홀로 5남매를 뒷바라지했다.


손 주교는 1972년 소신학교(성신고), 1975년 가톨릭대 신학부(가톨릭대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함께 공부한 박일 신부는 “공부, 교우 관계, 신앙, 인품… 모든 걸 잘 갖춘 친구였다”면서 “신학교 시절에는 마냥 착하고 고지식한 ‘범생이’(모범생) 같은 모습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유쾌해지고 유머 감각이 늘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손 주교를 “골계적(滑稽的) 해학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군에서 전역한 뒤 1982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교의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 인스브루크에 사는 한인 2세들이 다니는 한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봉사를 하기도 했다.


1986년 귀국해 가톨릭대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어머니가 누구보다 기뻐했다. 푸른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신학교 뜰에 무릎을 꿇고 아들 신부에게 감격스러운 첫 축복을 받았다.


1987년 로마에서 열린 재유럽 한국 사제ㆍ신학생 모임에 참석했을 때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기도 했다. 손 주교는 눈앞에 지나가는 교황에게 “찬미 예수!” 하고 한국어로 인사를 했고, 교황은 멈칫하며 “코리아?” 하고 물은 뒤 손 주교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1992년 귀국한 손 주교는 2년간 서울 용산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사제 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본당 신부’였다. 당시 사목회 총무였던 양인수(라파엘)씨는 “손 주교님은 보좌 신부님(조재형 신부, 현 교구 성소국장), 수녀님을 비롯해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신자와 스스럼없이 어울려 신자들이 무척 좋아했다”면서 “그때 사목회 임원들이 모임 ‘한울타리’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매년 찾아뵙고 있다”고 말했다.


1994년부터 18년 동안 가톨릭대 교수로 봉직했다. 항상 제자들과 소통하려 노력해 따르는 신학생이 많았다. 신학생들은 손 신부가 신학교를 떠나던 날 편지로 “신부님께서는 늘 신학생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면 기억하셨다가 꼭 챙겨주셨다”면서 “늘 성체조배를 하시는 신부님 모습에서 저희는 사제가 걸어가야 할 고독의 길,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사랑의 삶을 배웠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눈에 띄지 않게 나눔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2008년부터 한 청소년시설을 꾸준히 후원해, 시설 담당 수녀가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가겠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거절한 일도 있다. 박일 신부는 “연말이 되면 여러 곳에 알리지 않고 기부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사목국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일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권길중(바오로) 회장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주교님을 찾아가면 싱긋이 웃으시면서 ‘하느님 사업이 분명하다면 그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위로해주셨다”면서 “분열된 모습을 보이는 교회와 사회가 일치를 이루는 데 주교님께서 큰 힘이 돼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손 주교는 교리와 신학을 쉽고 친근하게 풀이하는 강연과 저술로도 유명하다.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 규범인 예수 그리스도」 「열려라 7성사」 「행복한 신앙인」 「주님의 어머니, 신앙인의 어머니」 등 10여 권이 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 약력

1957년 1월 28일 경기도 연천 출생

1975~1979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982~1986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신학대

                            (신학석사)

1986년 7월 4일 사제 수품

1986~1992년 인스브루크 대 신학 박사 과정 수료

1992~1994년 서울 용산본당 주임 신부

1996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박사

1994~2015년 2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2005~2012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2005~현재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 서울 대표

2012~현재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총무

2012~현재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2015년 7월 14일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임명


출처 : 평화신문  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81979&path=201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