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다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또 그대로인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던 흰 새의 날개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 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겨울 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 류시화,『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열림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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