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날 저녁에 생각나는 것은 /박종영
매년 이맘때 섣달그믐날 저녁이면
아버지는 가마솥에 물을 데어
우리 삼형제를 목욕시키고
물 부른 손톱과 발톱을 녹슨 가위로
물려받은 가난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정갈하게 씻고 닦아
보내는 시간과 다시 맞는 새해를
마음 가다듬고 소원 성취하라고
배불리 먹는 덕담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때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아버지의 세월은 눈가에 잔주름을 늘어만 가게 했고
한복 저고리 떼 묻은 동전 깃에서는
서러운 옛날 얘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별것 차림세도 없이
비좁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손놀림하며,
지난봄 그 안개 서린 들녘에서 낭만을 외우며 갓 뜯어와
봄볕에 말린 취나물과 고사리나물을 데쳐 찬물에 얼리고,
옛날로 달려가는 바닷가가 그리운지 가슴이 하얗다.
초하루인 내일쯤에는
우리 가족 모두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계곡물이 흐르고 따박솔이 촘촘히 자라선
하마터면 명당자리라고 불리는 운봉산 허리 자락,
나지막한 능선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에서
희망을 안고 성묘 차례를 지낸다.
기다려지는 이 그믐밤에
생각나는 풋풋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붉게 타오르는 설날 아침에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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