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포도를 쌌던 종이 ​/유종인

뚜르(Tours) 2025. 2. 23. 20:48

 

 

포도를 쌌던 종이  ​/유종인

구겨져 버릴 종이를 코에 갖다 대니

새콤 달달한 포도 내음이

향기의 글자로 그윽하니 씌어 있네

황소처럼 코가 벌름거려요

한 움큼 오백원 동전들을 뒤집을 만한

씩씩한 콧김을 나는 부리려 하네

그러나 포도는 없어요

포도의 전생(전생)이 씌어 있지요

휴지통에 버릴 뻔한 초가을 포도밭을

둥그런 종이의 주름살에 누벼 놓았네

그러고 싶어요 어떤 사랑의 무력감도

남은 포도 향기로 어루만져 주려는 것

더듬어 선하게 돋아나는 가을 풀들,

다시 침묵을 예술로 가다듬는 돌멩이

형틀에서 죄인을 푸는 손길

전생에서 현생으로 훌쩍 건너뛴 연애

누가 포도 쌌던 종이로 다솜을 감쌀 생각이면

오래도록 주머니에 넣고

목돈 쓸 궁리처럼 바스락거리네

다디단 어스름 같은 숨내여

쓸쓸한 들판이 필요해요

주먹만 한 포도 쌌던 종이로 귀를 싸매고

걸어보아요 맨발로 하늘에 닿을 듯

계절의 공부는 덧없음과 헤매임

귀를 싸맨 포도 쌌던 종이 하늘로 떨어져 나가요

나는 더 가난을 퍼담을 작정이네

ㅡ계간 《시와 편견》(2024, 가을호)

'이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봄날 /김용호  (0) 2025.02.27
모래카르텔 ​/서영택  (0) 2025.02.25
겨울 산에서 / 이건청  (0) 2025.02.21
동백꽃 훈령(訓令) /박종영  (0) 2025.02.20
우수 무렵 / 박재삼  (0) 2025.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