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지금은 ‘금기의 노래’ 취급을 받지만, 한때 ‘국민가요’였던 ‘6.25의 노래’이죠? 이 노래의 작사가는 1916년 오늘(3월 10일) 경기 안성시 봉남동에서 태어난 박두진입니다.
박두진은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분류되죠? 1946년 을유문화사는 《문장》 출신 시인 가운데 월북하거나 사망하지 않은 대표적 시인 세 명의 공통시집을 내면서 여기 수록된 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와 시집 제목을 《청록집》으로 했습니다. 이것이 ‘청록파’의 계기가 된 것이죠.
세 시인의 시는 특성이 강해, 이들을 한데 묶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지만, 셋 모두 자연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노래했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또 이들 모두 일제강점기인 1939년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는 것도 공통점이고요.
박두진은 소신이 뚜렷한 문학가였습니다. 1960년 4.19 때 교수 집회에 앞장섰고, 이후 학교 재단을 비판하다 해임됩니다. 그는 우석대, 이화여대를 거쳐 1972년 연세대로 되돌아와서 1981년 정년 퇴임합니다.
1970, 80년대 연세대에 다녔던 학생들은 박 교수가 여전히 강의를 하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곤 했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가슴이 크고 대쪽 같은 분으로 유명했는데, 수업은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진행했습니다. 우리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시인이 유려한 초서를 칠판에 흘리며 강의하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오명철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박두진은 정치 문화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자신이 권력화되는 것도 경계한 선비 같은 지식인이었습니다. 1946년 공산주의 문학 세력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했고,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발족에도 힘썼지만 이후 권력화하는 문화계 단체들과 거리를 뒀습니다.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인 한국예총 문인협회, 대한민국예술원 등에서 회원으로 추대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지요.
제자들이 졸업을 앞두고 돈을 거둬 ‘사은의 마음’을 전하자, “평생 제자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호통치며 돈동투를 내팽개친 일화도 유명합니다.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의 ‘문학 개인강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약자에 대해선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여러 해 살림을 맡았던 가정부가 결혼할 때 혼수를 챙겨주고, 아버지처럼 신부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입장했습니다.
한편, 조지훈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며 자신이 쓴 ‘지조론’에 어울리게 ‘독재정권’에 맞서며 꼿꼿하게 지내다 고혈압 합병증으로 47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박목월은 한양대 교수로 수많은 후학을 육성하며 서정성 깊은, 시 세계를 확장합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일제강점기와 ‘독재시대’에 청록파 시인들이 서정성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 지식인의 책임을 방기했다고 비판하지요. 그러나 예술과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고민한다면 어쩌면 그 비판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계 일부에선 지훈이 견지한 “부도덕하고 경박한 진보주의자보다 도덕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자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는 소신을 비난했습니다. 또 목월에 대해선 박두진이 거절했던, 육 여사의 가정교사 역할을 맡은 것과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에 대해서 비판하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절대적이진 않을 겁니다.
세 시인은 서로 결이 다른, 동료 시인들을 존경하며 지냈는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게 지내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본보기라고나 할까요? 자신들에 대해선 한없이 관대하고, 반대편에 대해 철저히 엄격한 좀생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대결과 비난의 시대’에 청록파 시인의 시를 음미하며 가슴을 넓히거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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