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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년 7월 11일] 교황, 헨리8세 파문

뚜르(Tours) 2007. 9. 11. 13:57

헨리 8세.

잉글랜드 왕 헨리8세의 주요 관심사는 대포·신학·여성이었다. 해군부를 창설, 영국을 해양대국으로 발전시켰고, ‘신앙의 소유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학에도 해박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욕정으로 왕비도 6명이나 갈아치웠다. 형이 죽어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8세의 첫 결혼생활은 그런대로 순탄했다.

 

그러나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헨리8세는 이혼을 결심하고 명분을 찾는다. 다행히 형제 아내와의 결혼을 금한 성경구절 레위기 20장21절이 눈에 띄었다.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이혼을 요청했지만 교황은 허락할 수 없었다. 당시 교황은 캐서린의 조카인 스페인 카를로스1세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8세는 의회를 통한 해법을 찾았다. 1532년 의회는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킨 잉글랜드 국교를 설립하고 왕을 수장으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공회는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1533년 7월 11일, 교황이 헨리8세 파문으로 보복했지만 약효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