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만들어진 우리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줄을 모릅니다. (1고린 13, 7-8)
훌륭한 웅변가 성 베르나르도는 당신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여긴 것을
우리도 사랑하게 했습니다.
'사랑이 언제나 그 원천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사랑이 그 원천으로 다시 흘러 들어갈 때 비로소 또다시 움틀 수 있는
신선한 힘을 얻게 된다.
베르나르도는 물론 시토회 사부들의 근본적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영적 삶의 직접적 목표이자
목적인 하느님 말씀과 '신비로운 결합'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심오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베르나르도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고 현실 안에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는 긴 강론 동안 졸고 있는
수도승이나 여러 편지에 언급된 화려한 숙녀들처럼 매우 쉽게 기억됩니다.
그는 또한 형제 자매들이 오로지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열망하도록 이끌어 주려 했던 선견지명을 지닌 신비가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연약한지 압니다.
이기심으로 끌어당기는 힘 그리고 분노와 비난과 증오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을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 베르나르도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사랑입니다.
가르치고 사도직을 수행하거나 주님 앞에서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한 사랑의 물길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랑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계명이요 둘째 계명이며 복음 메시지입니다.
사랑의 원천 곧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랑은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순수한 선물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사랑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랑이
순수한 선물임을 기억합시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사랑만이 위대합니다.
감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해 마땅히 응답하는 길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말씀과 각 개인의 일치에 대해
감동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결합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에 의해서 입니다.
의지를 다해 일치를 낳는 말씀과 영혼의 결합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피조물의 사랑과 창조주의 사랑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잣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피조물로서 우리가 더 작기 때문에 덜 사랑한다 할지라도
전존재를 바쳐서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내어준 이상 남아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사랑은 영혼의 모든 움직임과 느낌과 애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안에서 피조물은 창조주께 응답하며 은혜에 보답하게 됩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이 엄청난 존엄성을 인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따금 이 조그마한 자아를 넘어서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결합은 참되며 성인 성녀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감사드림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해
온 마음 다해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제게 바라는 것임을 알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성장하는 은총의 선물을
온 마음 다해 청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나는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더 작은 것에 머물러
만족하지 않게 하소서.
「 은총의 계절」에서
게일 피츠패트릭 著 / 서한규 譯 / 바오로딸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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