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2)

뚜르(Tours) 2009. 6. 14. 23:46

위기 때마다 한 몸이 되는 한국인 DNA

산불이 나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깨진다.
큰 짐승이든 작은 짐승이든 평소에 쫓고 쫓기던 관계에서 벗어나 다 같은 방향으로 살길을 찾아 달려간다.
위기의 한순간이 정글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단세포 편모충(鞭毛蟲)인 클라미도모나스는 암수의 구별 없이 세포 분열로 번식을 한다.
하지만 환경이 변해 질소 같은 것이 부족해지면 둘로 갈라졌던 것이 다시 한 몸으로 합친다고 한다.
위기에 대처하는 이러한 능력 때문에 클라미도모나스는 발생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모델 생물로 많이 이용된다.
우리는 평균 3년 만에 한 번꼴로 난을 겪어온 민족이다.
국난의 산불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뛰었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클라미도모나스처럼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관과 민이, 계층과 분파가 서로 증오하고 분열하고 얼굴을 할퀴다 나라를 잃는 실향민이 된 적도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평상시보다 위기에 강한 민족, 남이 멍석을 펴주는 것보다 제 스스로 일을 할 때
신명이 나는 한국인의 기질을 일찍이 그녀는 한국의 난민을 통해 간파한 것이다.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고 우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숍 여사는 이렇게 희망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고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어떤가.
지금 세계시장의 정글은 불타고 있다.
그 불길은 한국을 향해 번져 오고 북한은 로켓을 발사해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가.
P리스트, J리스트, K리스트…. 끝없는 검은 리스트의 행렬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암담하다.
백 년이 지났는데도 비숍 여사가 말한 <정직한 정부>, 그리고 <참된 시민의 발전>은 아직도 먼 곳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을 돌리면 세계의 무대에서 타오르는 또 다른 불꽃이 보인다.
WBC의 다이아몬드에서 뛰는 한국의 야구선수들이,
세계피겨선수권의 아이스링크에서 나는 김연아가,
그리고 한마음으로 열광하는 모든 한국인의 얼굴이 보인다.
함께 외치고 함께 감동의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또 미사일이 아니라 축구공을 놓고 남북한 젊은이들이 대결하는 잔디밭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비숍을 놀라게 했던 프리모르스키 난민들의 유전자가 어디엔가 마르지 않고 우리 핏속을 흐르는 게 보인다.
그러나 미안하다.
겨우 백 년 전 이방의 한 여인의 시각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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