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14)

뚜르(Tours) 2009. 10. 22. 08:43

耳鼻咽喉과 병원에 가서 <이가 아파서 왔는데요>라고 말해 보라.
간호사는 틀림없이 <여기 치과 아녜요>라고 할 것이다.
간판에는 귀를 이(耳)라고 써놓았는데 말이다.
역시 안과(眼科)에 가서 <안(眼)이 거북해서 왔다>고 하면 내과로 가라고 할 것이고
<목(目)이 아파서 왔다>고 하면 인후과로 가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한자말을 그렇게 많이 써왔는데도 역시 한국인은 세 살 때 배운 한국말로 해야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어의 반 이상(55.31%)이 한자말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사용 빈도가 높은 백 개의 말 가운데 한자어는 고작 16개밖에 안 된다는 통계다.
내 몸부터 살펴보라.
눈코입귀목손발배 등 모두가 단음절로 된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이다.
한자 바이러스를 막는 면역체가 내 몸 안에 있었다는 증거다.

같은 한자문화권인데도 일본 사람들은 동해(도우카이)를 통째로 한자말에 넘겨주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말끝에 끝내 토박이말을 붙여 <동해바다>라고 불렀다.
한두 개라면 틀린 말이라고 하겠지만 초가집, 처갓집, 역전앞, 황토흙,
거기에 일본말에서 온 <모찌떡>, 영어의 <빵떡>에 <라인 선상>의 영한(英漢)까지 겹친 말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천지인 三才처럼 인체어도 <머리> <허리> <다리>의 <리>자 돌림의 삼원구조로 되어 있고
머리에서 갈라진 머리카락, 손에서 갈라진 손가락, 그리고 발에서 갈라진 발가락의 파생어까지도 절묘한 삼분구조다.
제각기 따로 노는 영어의 <헤어> <핑거> <토우>와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세 살 때 몸에 밴 토박이말들은 배꼽 힘이 들어 있어 강하다.
최근 발견된 정조대왕의 어찰에서도 <뒤죽박죽>이란 말만은 한글로 적혀 있지 않던가.
김삿갓 역시 물속에서 노는 고기 떼들을 어쩌지 못하고 <수물수물>이라는 토박이 의태어를
한자음을 빌려 <水物水物>이라고 묘사했다.

동양에서는 음양사상이, 서양(희랍)에서는 수성설(水成說)과 화성설(火成說-탈레스와 엠페도클레스가 두 원류다)이 <물>과 <불>로 철학의 기간을 삼아 왔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한국말의 <물>과 <불>처럼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앞 글에서 설명한 대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서구의 <파파와 마마>의 유아 언어처럼
한국어의 물과 불은 선명한 M()/ P() 대응의 짝을 이루고 있다.
아버지는 불이고 어머니는 물이다.
그리고 물은 맑다고 하고 불은 밝다고 한다.
글자 모양까지 대비를 이루어 물에 뿔 난 것이 불이다.
그 자리에서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물불은 절묘한 세트로 접합돼 있다.

한국말처럼 음과 양의 모음조화로 이룬 의성어 체계,
머리허리다리처럼 삼분관계로 구조화한 신체어,
거기에 물불처럼 선명한 이항관계를 나타낸 말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물과 불은 분명히 상극한다.
물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
물은 하강하고 불은 거꾸로 상승한다.
그런데 물의 영혼은 반대로 김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고 불의 영혼은 재가 되어
거꾸로 땅속에 묻힌다.
그런데 이렇게 대립하고 갈등하던 물불이 조왕님이 계신 부엌에 들어오면
놀라운 조화의 힘으로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인다.

불과 물이 같이 있으면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일방적인 믿음 때문에
지구 온난화의 재앙을 일으킨 것과는 다른 현상이 벌어진다.
상극은 상생으로 변해 날것도 아니요 탄 것도 아닌 맛있는 문명의 밥상이 차려진다.

한마디로 세 살 버릇은 물불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철이 들지 못한 사람을 일러 <물불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30년 전에는 물불 모르는 사회주의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붕괴하는 것을 보았고
오늘날에는 과욕과 탐욕의 물불 모르는 자본주의가 리먼브러더스와 함께 물벼락을 맞는 광경을 보았다.
겸허한 마음으로 백두산에 올라 외쳐라.
한민족을 향해, 세계를 향해서 크게 외쳐라.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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