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각주구검(刻舟求劒)

뚜르(Tours) 2010. 1. 21. 10:34

2003년 새로 맡게 된 회사의 일로 연말 해외 출장을 다녀와서 새해를 맞을 때의 일이다.
습관화된 대로, 한 해를 돌아다 본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쓴웃음처럼 ‘각주구검(刻舟求劒)’,
그 날의 글 제목이 떠올랐던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6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어서, 그 동안에 나는 4년간의 징검다리 사장 노릇을 끝으로 경영직에서 은퇴하였고, 그 후 코칭 공부에 전념하여 전문코치가 되었다.
이미 장가들였던 큰 아들에 딸 둘 마저 시집 보내 혼사를 다 끝내었으며, 2006년 친손자가 하나에서 둘로 불어났고, 2005년에 태어난 외손녀가 하나, 내달이면 외손자가 하나 또 태어날 차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전에 썼던 글을 찾아 갑신년을 기축년으로, 을유년을 경인년으로 바꾸어 넣으니, 6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내용이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변한 것은 겉모양일 뿐, 마음 공부에는 아직 큰 진전이 없었다는 부끄러운 말씀이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얼빠진 무사(武士) 하나가 졸다가 손에 들었던 자신의 검(劒)을 강물 속에 빠뜨렸다. 빠진 자리를 표시해 놓아 나중에 그 검을 찾을 욕심으로 주머니 칼로 뱃전에 표시를 해놓았다는 중국의 고사(故事)를 일러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 한다.

기축년(己丑年) 지나니 경인년(庚寅年) 아니냐고, 흐르는 세월의 뱃전에 주머니 칼로 금[線] 하나 그어놓고,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본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은 내 꼴이 이 무사와 진배 없다는 탄식이다.

불학(佛學)에 심(心)의 찰나(刹那)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Thought-moment 라 한다는데, 본디 무상(無常)한 일체의 존재는 매 찰나마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듭한다는 뜻이니, 존재라 이름하는 바 환(幻)의 끊김과 이어짐[斷續]을 설명한 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읽은 영어 불교입문서에는 ‘매 찰나 그대는 죽고 다시 태어난다[Every moment you die and reborn]’라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쓰여져 있었다.
누군가의 해설을 빌리면 활동사진이 1초에 25장 화면[Frame]이 돌아감으로써 관객에게는 마치 연속하여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단속(斷續)이 중생에게는 연속하여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착시 현상에 준한다는 것이다.
단속(斷續)하는 환(幻)의 찰나 그 화면[Frame] 사이에 금[線]을 긋는다면 아마도 그 금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공일 것이니, 이로써 일순 온갖 환(幻)이 사라질 것이다.
금 긋기라면 뱃전에 어설픈 칼자국을 낼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이런 금 긋기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손지우손[損之又損], 덜어내자[損], 덜어내자 입으로는 6년을 별렀건만, 구두선[口頭禪]의 결과는 역시 별무신통이다.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위에 금 하나 긋고 돌아보면 저 금과 이 금 사이에서 아직도 두 가지 상념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구차스러운 안도(安堵) 몇 가지, 그리고 아직도 착[着]을 내려놓지 못해 생겨나는 여러 가지 석념(惜念)이다. 허구(虛構)로 만들어놓은 대차대조표에 일상(日常)이라는 이름으로 무의미한 덧셈과 뺄셈을 되풀이 하고 있다.

나선(螺旋) 운동의 아름다움은 한 바퀴 휘돌아와서 자신이 떠난 자리를 내려다 보는 데 있다고 한다. 한 해를 더 살고 되돌아와 경인년과 신묘년[辛卯年] 사이에 다시 뜻있는 금 하나 그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니 그것이 언제 오든, 마침내 삶과 죽음 그 심[心]의 찰나[thought-moment] 프레임 사이에 금 하나 그을 때, 오늘 떠난 이 자리를 넉넉한 마음으로 내려다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각주구검(刻舟求劒) 표지 밑 거기, 시공[時空]의 강물 속에 제아무리 자맥질한다 해도, 마침내 잃어버린 검(劒)을 되찾을 수 없음을 스스로 이룬 지혜로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보란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정의[定義]를 코칭 워크숍 어느 곳에선가 인용하였던 기억이 난다. 간디는 사탕을 과도하게 먹는 버릇 때문에 병든 아이를 고쳐주기 위해, 먼저 2주[週]씩이나 걸려 자신의 사탕 먹는 습관을 버리고 나서, 비로소 아이를 불러 가르침을 주었다던데……

부끄러운 마음으로 금 하나 그어 다시 시작하자.
주머니 칼로 뱃전에 그은 얼빠진 표지[標識]가 되든, 보리[菩提]를 찾아 떠나는 발심의 출발선[Start Line]이 되든 다 마음 먹기 하나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링크: 현대불교 제766호 10.1.14. ’허달의 불교와 코칭30’ 각주구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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