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양豫讓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범씨 및 중행씨 휘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떨치지 못하여 지백智伯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백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하였으며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여 매우 아꼈다.
그러나 예양이 지백의 후대를 받으며 살아가던 중 지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래 진晉의 6경六卿은 범씨·중행씨·지씨, 그리고 한·위·조 이 세 집안이었다.
범씨와 중행씨는 먼저 망하고 나머지 네 사람이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지백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지백은 세 사람에게 땅을 바치라고 강요하였다.
한의 강자康子는 굴복하여 만호를 내주었고 위의 환자桓子도 만 호를 주었다.
그러나 조의 양자襄子만은 지백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지백은 크게 노하여 조양자를 공격하였으며, 한과 위에게도 군사를 동원토록 하여 연합군으로 조양자를 공격하였다.
연합군과 조양자는 진양성에서 대치하였다.
진양성은 조양자의 아버지 조간자가 다스릴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조씨와 죽음으로써 싸우기를 맹세한 곳이었다.
진양성의 모든 백성들은 똘똘 뭉쳐 지백이 거느린 연합군과 맞섰다.
한 계책을 세운 지백은 진양성을 포위하고 하천을 막아 그 물을 모두 진양성 안으로 몰아 넣었다. 성을 물에 잠기게 하자는 작전이었다.
진양성은 물에 점점 잠기어갔다.
이때 조양자의 머리에 기사회생의 묘책이 떠올랐다.
그는 몰래 신하를 한·위의 진영에 파견하여 설득했다.
“만일 조가 망하면 그 다음은 누구 차례입니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되는 법입니다(脣亡齒寒).
결국 지백에게 모두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셋이 힘을 합해 지백을 치는 것만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정말 그렇군요. 그런데 지백을 이길 계책은 있습니까?”
“지금 진양성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길을 지백의 진영으로 돌린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세 진영은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정했다.
조양자는 약속된 날짜에 군사를 보내어 제방을 지키던 지백의 군사를 죽이고 물길을 지백의 진영으로 돌렸다.
갑자기 물난리를 만나 우왕좌왕하는 지백의 군사를 한·위의 군대가 일제히 협공하고 조양자가 정면에서 치니 지백의 군사는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조양자는 지백을 죽이는 한편 일족을 모두 멸하고 천하를 3분하여 조·한·위로 나눴다.
사람들은 이를 삼진三晋이라 불렀다.
한편 조양자는 지백을 지독히도 증오하여 죽인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여 요강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예양은 산속으로 도망해 굳게 다짐하였다.
“아아!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고,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해 주는 이를 위해 얼굴을 가꾼다.’고 하였다.
지백이야말로 진실로 나를 알아 준 사람이었다.
내 반드시 그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그래야 내 혼백魂魄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죄인들의 무리에 끼어 조양자의 궁중에 들어가 변소의 벽을 바르는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 양자를 찔러 죽일 기회만을 노렸다.
어느 날 양자가 변소에 갔는데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므로 이상하게 여겨 벽을 바르는 죄수들을 심문審問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품 속에 비수를 지니고 있던 예양을 찾아냈다.
양자는 몹시 화가 나 그 까닭을 묻자,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였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달려들어 예양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그들을 말렸다.
“저 사람은 의리 있는 선비이다.
나만 조심하면 될 일이다.
지백이 죽고 자손도 없는데 옛날의 의리로서 복수를 하려 함은 천하의 현인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예양은 풀려날 수 있었다.
얼마 후 예양은 또다시 복수를 위해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병을 가장하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마저 바꿨다.
그렇게 남이 알아 볼 수 없도록 변장하고 시중에 나가 걸식을 하였다.
마누라조차 그를 알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 그는 친구를 찾아갔다.
“예양이 아닌가?”
예양이 고개를 끄덕이니 친구는 울면서 말했다.
“자네의 재능으로 양자에게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면 양자는 틀림없이 가까이 해 총애할 것이네.
그런 뒤에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오히려 쉽지 않은가.
어찌하여 이렇게 몸을 자학하고 모양을 쭈그러뜨려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오히려 어렵지 않을까?”
그러자 예양이 말했다.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면서 주인을 죽이려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자의 행동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천하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푸는 자들을 경계하려는 것이다.”
얼마 뒤 예양은 양자가 지나는 길의 다리 아래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양자가 다리에 이르자 말이 놀라 깡충 뛰었다.
깜짝 놀란 양자는,
“이는 틀림없이 예양 때문이다.”
하고 주위를 수색하도록 하니 과연 예양이 있었다.
양자는 예양을 꾸짖었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중행씨 밑에 있지 않았는가.
지백은 그 두 사람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그때는 복수하지 않고 예물을 바쳐 지백을 섬기었다.
그 지백도 이제 죽었다.
그대는 어찌 지백만을 위해 이토록 끈질기게 복수하려 하는가?”
그러자 예양이 말하였다.
“내가 범씨와 중행씨 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두 사람은 모두 나를 그저 그런 사람으로만 대하였소.
그러므로 나도 그들을 그저 그런 사람으로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하였소.
따라서 나는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아아! 예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애쓴 목적은 이미 이루었도다.
내가 그대를 용서해 주는 것도 이제 할 만큼 다했다.
나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는 군사에게 명령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하니 예양이 말했다.
“명군名君은 사람이 아름다운 점을 덮어 숨기지 않고,
충신은 이름을 위해 죽는 의로움이 있다.’고 들었소.
지난번 그대가 나를 관대히 용서한 일로 천하에서 그대의 어짐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오늘 일에 나도 두말 하지 않고 머리를 바치겠소.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그대의 의복을 얻어 그것만이라도 베어 복수의 마음을 청산하고 싶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크게 감동한 양자는 하인을 시켜 자기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다.
옷이 도착하자 예양은 칼을 뽑고 세 번을 뛰어 올라 옷을 베었다.
그런 다음,
“이 사실을 지하의 지백에게 보고하리라.”
하고는 칼에 엎어져 자살하였다.
조나라의 지사志士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모두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사마천 지음 <사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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