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그래도 행복한 나무

뚜르(Tours) 2011. 9. 15. 23:10

 

   이십 대 시절, 마음을 붙잡지 못해 몹시도 산을 찾은 적이 있다. 
산을 헤매다 곤경에 처하게 되면 대개 이름 없는 작은 암자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다. 
내가 아는 한 비구니 스님도 그렇게 만났다. 
산에 갈 때마다 만나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한 사이다.

 그런 어느 날 암자에 들렀다가 절방에서 할로겐 스탠드를 보게 된다. 
독일 여행에서 돌아온 암자의 돈 많은 신도가 선물했다고 한다. 
요즈음에야 흔하지만 백열전구 스탠드만 보던 당시 나에게 할로겐 전구의 빛남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반농담으로 나에게 선물하면 어떻겠느냐고 중얼거렸다. 
얼마 뒤 암자를 떠나는 나에게 스님이 시커먼 백을 건넸다. 
집에 와서 보니 생강 절임과 함께 문제의 램프가 분해돼 담겨 있었다. 
다음 산행에서 돌려주길 시도했지만 스님은 완강했다. 
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이고, 내가 주인임이 분명하다고 잘랐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유라는 것, 무소유라는 것, 나아가 무엇을 준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있다. 
비록 동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는 명작, 고귀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뭉클한 이야기다. 
사과나무 한 그루는 매일같이 소년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다. 
하지만 소년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진다. 
그래도 나무는 가끔씩 찾아오는 소년에게, 소년이 필요로 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도회지로 나간 소년은 연이은 실패로 늙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나뭇가지와 줄기, 심지어 그루터기만 달랑 남겨두고 몸통까지 잘라 간다는 것이 줄거리다.

 그런데 영어로 된 책은 계속되는 몸 잘라가기에도 불구하고 ‘but the tree was happy’가 아니라 ‘and the tree was happy’라고 서술하고 있다. 
아니, 열매에 이어 가지 줄기, 심지어 몸통마저 잘라가는 마지막 순간에서만큼은 당연히 ‘but the tree was happy’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끝까지 ‘and the tree was happy’라고 고집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같은 등위 접속사인 ‘and’와 ‘but’ 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 본다. 
굳이 번역하자면 ‘and’의 경우는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로, ‘but’의 경우는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온몸을 다 주고도 행복했다는 문맥으로 본다면 ‘but the tree was happy’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는 ‘and the tree was happy’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로 끝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학기가 끝나는 종강 시간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얘기로 끝을 맺곤 한다. 
그리하여 ‘but’보다는 ‘and’가 주는 그 깊은 의미를 나의 수강생들이 깨닫고 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나의 메시지를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김동률 / 서강대 기술경영(MOT)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