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이기심과 이타심

뚜르(Tours) 2012. 12. 16. 22:43

‘사명에 투자하라’는 말이 자칫 개인의 이익은 희생한 채, 타인 혹은 공공의 미래만을 꿈꾸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들은 사명을 추구하는 이에게 ‘제 앞가림도 못한다’는 식으로 타박한다.
당장 자신의 앞길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앞길을 개척할 수 있겠느냐는 것.
하지만 이는 이익과 사명이 가진 독특한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성질을 알기 위해선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프레임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흔히 이기심은 ‘자신을 위한 마음’, 이타심은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둘은 섞일 수 없는 흑백의 관계로 정의된다.
이를 ‘이익과 사명’에 적용해 본다면 이익은 이기심, 사명은 이타심의 영역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이익과 사명 역시 서로 배척된다고 여긴다.
사명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제 앞가림도 못한다’고 타박하는 건 이런 흑백논리가 전제되기 때문.
하지만 이타심이 확장되면 더 큰 이기심이 된다.
이제껏 완전히 다른 것이라 여겨졌던 이타심과 이기심이 공존의 영역에 재배치되는 것.
논어(論語)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이인편)
“군자는 작은 일은 알지 못해도 큰 것을 받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을 받을 수 없어도 작은 일은 알 수 있다.”(위령공편)


이타심의 영역에 있던 의에 집중하고 그것을 추구했더니 이기심의 영역에 있는 이익이 더욱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타심과 이기심이 혼재되고 융합되는 역설은 자연 현상에서도 나타난다.
꿀벌은 여왕벌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던지고,
수컷 사마귀는 교미 후 암컷의 산란과 영양 보충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먹이로 희생한다.
이것은 이타심일까.
종족의 유전자를 보호하려 하는 이기심의 또 다른 발로가 아닐까.
즉 이타심은 또 다른 이기심이 될 수 있고, 이기심은 이타심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이익과 사명을 배척의 관계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명을 바라보라.
이렇게 사명을 추구하다보면 그것이 확장돼 더 큰 이익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남훈 / 경제 경영 전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