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모습 보여선 안 돼.
1302호 초인종을 누르면서 민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술을 마신 사람처럼 얼굴까지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별일 없을 거야.
나는 정당한 항의를 하는 거라고.
민수는 호흡을 내쉬면서 재차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은 점퍼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남자가 어쩜 그리 담이 약할까?
지지난 주였던가, 밤 열한 시 무렵 1302호에서 예의 또 그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와 동시에 이제 막 백일이 된 딸아이가 얕은 잠에서 깨어나 자지러지게 울어댔을 때, 아내는 대번에 민수를 흘겨보며 그렇게 뇌까렸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는 소음이었다.
닷새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우다다다, 마치 쥐 떼가 단체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타기라도 한 듯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어느 땐 십 분 넘게 지속되었고, 또 어느 땐 이십 분 이상 계속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민수는 허리에 두 손을 착 얹고 ‘사람들이 예의가 없어, 예의가’ 하면서 천장을 노려보았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내로부터 담이 어떻고, 가장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하지만 그건 아내가 1302호 남자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다.
주차장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1302호 남자는 오십대 중반의 사내였는데, 가슴에 무슨 이희승 판 국어대사전이라도 갖다 댄 듯 체구가 우람했다.
짧게 자른 희끗희끗한 스포츠 머리와 매서운 눈매, 거기에다 그가 내린 승합차 옆면에는 ‘화랑 격투기 교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내를 때리거나 자식을 패는 것일지도 몰라.
그런 마당에 내가 올라가서 항의를 하면….
민수는 종종 1302호 남자에게 니킥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암바에 걸려 탁탁, 한 손으로 바닥을 때리면서 ‘예의가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예의가 좀 없을 수도 있지요’라고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 또한.
하지만, 오늘은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딸아이는 어제 저녁부터 열이 올라 오늘 하루 종일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돌아온 처지였다.
그런 마당에 니킥과 암바 따위가 두려울쏘냐.
여차하면 바로 경찰을 부르면 된다.
민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뭡니까?
초인종을 네 번쯤 눌렀을까, 문이 빠끔 열리면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저… 그러니까… 1202혼데요.
그런데요?
저기… 저, 소리 때문에… 딸아이가 아파서 좀….
민수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남자가 문을 활짝 열고 한 걸음 더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잠깐 들어오겠어요?’라면서 민수의 팔을 잡았다.
민수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쳤으나 이내 남자의 완력에 질질, 거의 반강제적으로나 다름없이, 1302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수는 희한한 광경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파자마를 입은 할머니 한 분이,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을 잡으려고 거실과 부엌, 방과 방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 어머니와 제 아들입니다.
현관 입구에 서서 1302호 남자가 말했다.
어머니가 치매기가 좀 있으신데… 가끔 우리 아들을 돌아가신 아버지로 착각을 해요.
남자는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젊었을 때 딴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말렸는데… 지금은 그냥 냅두는 처지입니다.
우리 아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요… 저렇게 쫓아다니시고 나면 잠도 잘 주무시거든요.
남자는 그러면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제가 평생 운동만 해서… 숫기가 좀 없거든요.
진작 말씀드린다는 게….
민수는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할머니 앞에서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1302호 남자의 아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민수는 말없이 그 아이의 표정을 따라 지으며, 자신의 딸 또한 저런 표정으로 자라나길, 속으로 바라보았다.
이기호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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