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랑 / 복효근
공중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그냥 나왔다
5미터 정도를 걸어 나왔다가
아니지 이건 아니지
지방대학이긴 하여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대한민국의 교사고 명색이 시인인데
아니지 이건 아니야 하여 돌아가서 물 내리는 버튼을 누르고 나왔다
그제서야 두 아이의 아버지로
당당한 가장으로
대한민국의 교사로 시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은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서라도 자랑하고픈 일이다
자랑할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일도 없고
이생에 영웅스러운 일은커녕 제대로 아비다운 아비인 적 없던
교사다운 교사인 적이 없던
가장다운 가장인 적 없던
더구나 잘나가는 시인인 적 없던 내가,
소변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돌아가 버튼을 누를 사람 몇이나 있을까 생각하자면
나에게 소주라도 한잔 사주고 싶은
아, 나는 이렇게 나에게 당당한 시간이 있기도 하다
- 복효근,『예를 들어 무당거미』(현대시학사, 2021)
'이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운 사람 /조용미 (0) | 2023.12.20 |
---|---|
겨울밤 연가 /점심 김덕성 (0) | 2023.12.18 |
겨울인생 /정회선 (0) | 2023.12.16 |
눈 내리는 숲길에서 /박동수 (0) | 2023.12.14 |
12월의 그림자 /이원문 (0) | 202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