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겨울 소묘 /김흥님

뚜르(Tours) 2024. 1. 12. 12:07

 

 

겨울 소묘   /김흥님

 

 

어머니,

긴긴 겨울밤 함박눈이 내립니다

잠이 쉬이 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구멍 난 문풍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의 옛 편린들이

신작로 따라 총총히 길을 나섭니다.

 

영혼의 단잠을 깨우려는 듯

예배당 새벽 종소리가 들립니다.

부뚜막에 앉아 군불 지피는

젊은 날 어머니가 보입니다.

아랫목엔 밀주 익어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고

호마이카상 앞에 단말머리

어린 소녀가 앉아 있습니다.

 

오금 저리던 상여 집을 지나자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가 펼쳐지고

굴뚝마다 모락 연기 피어오르는

오두막집 창문들 사이로

하나 둘씩 켜지는 따스한 불빛,

눈 속에 파묻힌 동화의 나라가

도란도란 걸어 나옵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할머니가 안경 너머로 들려주던

옛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화롯가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아이들은 세월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먼 길 떠난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눈길에 길을 잃었나 봅니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고드름 하나

어머니의 심장을 겨누어 떨어지던 날

참척(慘慽)의 고통

외마디 비명도 내지 못한 채

그 비통한 슬픔을

어찌 다 가슴에 묻으셨습니까?

 

어머니,

세월의 강을 건넌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은

얼키설키 소담스레 쌓여만가고

또 더러는 녹아 내려 얼음장 밑

곤히 잠든 봄을 불러내겠지요

 

유년 시절의 멈춰버린 시간

그날의 겨울처럼

눈이 무릎까지 소복이 쌓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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