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 강미정

뚜르(Tours) 2024. 2. 26. 14:38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 강미정

애 밴 여자가

한 손으로 불룩한 배를 안고 또 한 손으론 허리를 받치고 지하철 객차에 올랐다

책을 보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눈감은 사람, 핸드폰 액정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 애인과 마주보며 이야기에 골똘한 사람,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자리를 양보한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뒤뚱뒤뚱 내가 앉았던 자리로 와서 앉는 여자의 배를 보며

마음 속으로 배를 한 번 둥그렇게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만져봐도 될까요? 첫 애를 가진 둥그런 내 배를 쓰다듬으며 눈물이 맺히던 아버지,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비좁은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애 밴 여자 쪽으로 왔다

지하철 안은 갑자기 조용해져, 책이 사라지고, 이어폰이 사라지고, 핸드폰 액정

화면이 사라지고, 와글와글 입들이 사라지고, 새까만 눈만

꼴깍 침을 삼키며 아버지의 목소리에 꽂혔다

한 번 만져 봐도 될까요? 애 밴 여자 앞에서

쭈굴쭈굴한 손을 내민 할아버지 참 애절한 눈빛과

놀란 눈으로 몸을 움추린 애 밴 여자의 난감한 눈빛

이 영감탱이가 노망들었소? 할아버지 손을 끌어당기는 할머니

참 미안혀요, 나가 젊었을 때 뱃속에 든 애를 놓쳤는디, 애 밴 사람만 보면 이러요,

내 배에 남아 있는 떨리던 손바닥 무늬 같은 게 가슴으로 올라온다

오래도록 내 눈을 맞추며 웃던 아버지를 할머니가 손잡고 간다

​계간 『미네르바』 2011년 겨울호 발표

 

<출처 : 시와 음악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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