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제3부 길이신 그리스도 ㅣ (1) 구성원을 성화시키는 교회

뚜르(Tours) 2008. 10. 18. 11:26

 

제3부  길이신 그리스도


3-1. 구성원을 성화시키는 교회

 


  완전함이란 주님과 일치하는 데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밖에서 구해야 할 어떤 도덕적 장식품이 아니다.

완전함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손수 완수하시는 작업이다.

완전함은 성령의 은총으로 완성되는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좀더 완전하게 사는 길을 볼 수 있는 그분 가르침과 교회의 성사와 교훈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완전함으로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서약과 함께 종교적인 신분이 주어진다.

교회의 가르침 아래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영감에 따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Spirit of Christ)의 인도를 받고

외적으로는 가시적인 교계 제도, 법, 가르침, 성사와 전례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는 ‘하나의 그리스도(One Christ)’로 성장해 간다.

 


  우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기관이나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가르침과 통치와 예배 방식 안에서 확실히 가시적이며 명백하게 인식 가능한 실체다.

이러한 외적인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 교회의 혼이 지니는 빛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영혼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 그 자체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이 불완전함은 그분의 완전함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일치되어 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과 살아 있는 유대를 맺고 있는 한,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지탱되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정화된다.

전능하신 구세주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구성원인 우리 자신을 확실하게 성화시키고 인도하시며,

우리를 이용하시어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다운 본질은 하나의 몸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며’

서로에 대해 거룩한 섭리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인들의 통공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거룩한 이들이다.

그들의 기쁨은 생명의 강이라는 순순한 흐름을 맛보는 것으로 그 강물이야말로 하느님 도시 전체를 기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함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그분과의 교류를 심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문제이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삶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깊이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과 더욱 가까운 유대를 맺어야 함을 의미하며,

살아 있고 성장하고 있는 신비체라는 영적인 조직 안에서 그들과 더욱더 충실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영적인 완전함이 ‘사회적 순응’의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라는 효율적인 기계 안에서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자신의 영혼이라는 지성소에서 내적으로 하느님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결코 성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교도권에 의해 축복받은 전통적인 규범의 규제를 받는 수도자의 평범한 일상은

확실히 가장 값진 성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수도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그 규범들은 목적을 갖고 있고 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건물을 짓느라고 설치한 임시 장치를 실제 건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실질적인 건물이라고 하면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기 초월로 가득한 마음들 간의 일치인 것이다.

이 건물의 건실함은 성령이 우리 각자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체계에 의해 정돈되고 규제되는 외적인 행위들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삶은 필수적으로 특정 질서를 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형제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질서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단순히 질서정연하다고 해서 그것을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적인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건물 자체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임시 장치를 영구적으로 더욱 단단하고 안전하게 세우는 데에만 너무 많은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고독하고 내면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지녀야 할 진정한 책임에 대해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어느 누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 내면적인 영역에서 진보나 완전함을 증명할 만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반면 외적인 영역에서의 발전은 쉽게 측정될 수 있고 결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보여져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진실되며 지속적인 작업은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 작업은 명백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대한 충실함이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충실함이다.

그분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전적으로 지배하도록 수락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내적이고 고통스러우며 극단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우리가 전례 때마다 교회와 함께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각자 내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놓았을 경우에 한해서만 진실하고 타당한 것으로,

그 뜻은 외적으로는 교회와 그것의 위계로 나타나고 내적으로는 은총이 주는 영감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투항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거는 것이며,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부터 모든 힘과 거룩함을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