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이 유년시절 뛰놀던 송강리 솔밭에 세워진 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0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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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는 두 개로 하나는 그가 태어난 영천의 "황성옛터(조양공원) "노래비 또 하나는 그가 유년시절을 보내고 그의 묘(墓)가 있는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31번 국도변 송강리 솔밭에 "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가 지난 10월에 세워졌다.
그리고 왕평의 출생지 영천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황성옛터란 노랫말로 민족혼을 일깨운 왕평(이응호)을 기리는 왕평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가요 황성옛터 노랫말을 지은 왕평 이응호는 1908년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5~7세)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에서 잠시 살았고 그의 묘소도 송강리 3번지 수정사 앞산에 있다.그가 유년시절에 살았던 옛집이 지금도 수정사 아랫마을 길가에 있다.
왕평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 1기생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극작가,가요 작사가로 일제 강점기의 설음을 극단 연극사(硏劇舍)에서 예술로 달래던 1927년 여름 밤.
중국과 만주 공연을 순회한 극단 연극사(硏劇舍)의 일행은 황해도 개성에서 공연 하고 있었다.
때늦은 장마로 며칠을 공치면서 고향이 개성인 작곡가이자 연극사의 바이올린 연주자 전수린은 왕평과 만월대에서 폐허의 황성옛터를 바라보며 망국의 설음에 눈물 지었다.그 날밤 늦장마비가 여인숙의 창틀을 때리는 소리에 몸을 뒤척이던 전수린은 불현듯 바이올린의 활을 잡아 비분(悲憤하고 서러운 곡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곡조는 오선지에 옮겨졌고,왕평이 노랫말을 적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일우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 없이 눈물져요. 》
이렇게 개성 여인숙에서 탄생된 황성옛터는 그 해 가을 단성사에서 이 애리수의 노래로 무대에 올려지게 된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 오는 이 애리수의 애잔한 노래에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후 황성옛터는 황성(荒城)의 적(발자취 적 跡)이란 곡목으로 Victor에서 음반이 출시되어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조선인으로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백성의 민족정서를 자극한 국민 노래였다. 이로 인해 이응호(왕평)와 개성 출신 작곡가 전수린은 일제 헌병대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당하며,황성옛터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으로 조선인들은 못 부르게 했다. 그 무렵 일제의 탄압과 압제는 가중되어 견디다 못해 개나리봇짐을 메고 고향산천을 등지고 만주로 떠나며 황성엣터를 불렀다.
왕평은 이후에도 민족성 강한 노랫말을 담은 대한팔경, 조선행진곡 같은 작사를 하였으나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194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공연을 하던 중 무대에서 쓸어져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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