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 50년,만리 객창(客窓)에서 살고 있는 것이 흡사 위리안치의 형을 살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래도 몸을 겨우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좁은 감방에 갇힌 기분보다는 나을 것이란 생각으로 웃으며 버티고 간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우울증의 가장 특별한 증상의 하나가 locked up된 느낌이라고 한다더니,
나이가 포개지면 점점 삶의 범주(範疇)가 축약(縮約)되면서 조여 오는 느낌을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 조상들은 국법을 어긴 관리들을 치죄하는 방법의 하나로 유배(流配)를 택하였다. 유배는 죄인을 임금이 사는 도성에서 멀리 내치는 것으로 대개 곤장 일백 대를 가하여 죄의 경중을 따라 2,000리에서 3,00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유형(流刑)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본향안치(本鄕安置), 사장안치(私莊安置), 자원처안치(自願處安置), 절도안치(絶島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등이 있는데 위리안치는 죄가 많은 사람을 탱자나무나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문밖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그 속에서 형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위리안치는 죄가 많은 사람들을 멀리 떨어져 살게 하는 악형 중의 하나로,
그것은 삶이라기보다는 형을 치르는 것이라는 말이 맞으리라고 생각된다.
초가삼간에서 뻥 뚫린 하늘만 쳐다보면서 달이나 보고 별이나 헤아리며 살아가는 삶이니 아무리 죄를 갚는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거기다 죄갚는 시한이 있다면 모르되 그 죄가 언제 끝날지도 알지 못하고 마냥 먼 도성에서 임금님의 면죄( 免罪) 명령이 떨어져 말 탄 지방관원이 무원고립(無援孤立)한 벽처(僻處)를 찾아들기를 기구하는 그 심정을 헤아려 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가을이 가까워 오면 그럴수록 한나절 땀 흘리고 서늘바람에 땀이 걷히면 밀려오는 오수(午睡)처럼 짙은 향수가 밀려온다.
철 없던 시절 황금물결로 출렁거리던 들판을 달려가 메뚜기 잡기에 골몰하고, 오색으로 수놓은 감나무 이파리를 모아 셈을 헤아리던 시절, 밤나무 아래 서 있으면 후드득 알밤이 듣고, 산사로 가는 길목마다 빨간 단풍잎을 싣고 졸졸졸 흐르던 맑은 시냇물에 비추이던 비취색 고운 하늘이 그립다.
쓰르라미와 매미의 울음이 온통 온 지구를 통곡하면, 밤을 지새워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울음이 열다섯 살 난 소녀를 싣고 가는 상여(喪輿) 군들의 만가(輓歌)처럼 서럽다.
가을은 코스모스 꽃잎을 타고 와 대추나무 붉은 열매에 매달려 밤을 지새우며 별빛을 기다린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마다 태곳적 전설을 한 아름씩 싣고 와 아침나절 말쑥한 해님이 아침노을을 싣고 눈부신 눈빛으로 미소를 지을 때까지 밤새워 전설은 실고추 풀리듯 속살거린다.
노란 은행잎이 황금빛 날개를 달고 하나씩 하나씩 지상을 항하여 신중한 비상(飛翔)을 시도한다.
초설(初雪)을 기다리는 것이다.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이라던 옛 유행가 한 자락은 어째도 서당 훈장님 말씀처럼 서릿발이 감돈다.
황금빛 벌판은 도회로 변모하여 고층건물이 도열하였고, 빨래터 시냇가는 연자방아와 함께 돌던 물레방아를 안고 저수지 속에 깊이 잠들었는데, 효자, 열녀를 자랑하던 비석거리 작은 비각(碑閣)은 " 니나노" 집과 룸살롱으로 가득한 요정의 거리로 변하여 취객들의 혀 꼬부라진 유행가에 젖어 질탕한 욕정의 파도 속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하루 종일 가야 정오를 알리는 수탉의 꼬끼오 소리 말고는 솔바람소리 밖에 들리지 않던 곳에 하이웨이가 가로 지르고, 열차가 덜커덕거리는 굉음을 울리며 달려 오간다.
자동차의 경적소리, 술 취한 여인들의 코맹맹이 소리가 온 하늘에 가득한 거리는 이미 내 고향이 아니다.
한 때,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고 바다에서 함포사격 하던 대포소리, 제트기의 날카로운 폭음이 울리고부터 그 곳은 변모를 시작하더니, 이젠 영 넘어 가도 조용한 곳이 없단다.
어디 사람이 밥 먹고 차 타고, 아이 낳고 기르고 그러고만 산다던가?
가랭이 긴 삼베 옷 입고 아침 이슬 적시며 논두렁길을 거닐면서 산다고 어디 덧난다던가?
사람 한 평생이 바람과 구름과 별빛에 싸여 산다고 어리석으란 법이나 있다던가?
햄버거, 피자 먹고 산다고 장수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던가?
사람 사는 것이 몰라서 그렇지, 감자 캐고, 옥수수 심어 맑은 물마시고 김치 먹으면 사는 것을 모두 늦게 깨달았겠지만, 미국 쇠고기 먹으면 미쳐 죽는다는 말도 못 들었던가?
그런 헛소리 하는 지랄병자가 거리마다 질펀하다는데. 아무래도 이 유배에서 떠나기는 떠날 것이다. 그 때 육신이란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두터운 옷을 벗고 주상(主上)의 면죄방면을 받을 것이다. 자유 (自由)라는 영혼의 날개를 타고 천국의 문을 열고 훨훨 날아가는 날에는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가슴이 저리고 아프던 내 영혼이 국화향이 짙게 퍼지는 천상의 나라에 오르리라.
아무리 울려고 해도 슬프지 않고, 아무리 미워하려 해도 밉지 않은 영혼의 세계에서 뜨겁지 않은 따스한 태양아래 천국의 맑은 오수(午睡)를 즐기리라.
탱자나무에서 노란 낙엽이 듣고, 가시나무에서 노란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흩어지는 날에는 아무래도 하늘이 더 높아지고, 별빛이 더 초롱초롱 하겠고, 만월이 되어 밤이 깊으면 무주공산에 내가 주인이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비록 촉대(燭臺)도, 황촉(黃燭)도 없지만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읽을 만하지 않을 것인가?
위리안치에서 벗어나 주상의 면죄방면을 받는 날에는 내 누구와 이 기쁨을 함께 나눌 것인지?
가시에 찔려도 아프지 않고, 주머니에 노잣돈 한 푼이 없어도 두렵지 않네.
무주공산에 걸린 밝은 달이 나를 이끌어 갈 것이므로. 이 천형(天刑)의 땅에서 가시 울타리 치고 뻥뚫린 하늘 쳐다보며 반달을 반긴다.
계수나무도 옥토끼도 우주선에 밟혀 묻혀버렸지만 달밤은 여전히 내게 꿈이 있어 좋다.
조락(凋落)의 계절은 그래도 삶과 죽음을 머리 숙여 생각하게 하고, 먼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 위와 태백산맥에 첫눈이 오는 날을 기다려 나무 잎사귀들의 조상(弔喪)을 곡(哭)하리라. 낙엽은 어차피 커피 향을 냄새하며 지구로 귀환함이려니와 내 영혼의 귀의처는 멀고 먼 하늘나라. 가을이 비단 치마 저고리 입고, 연지 곤지 단장하고 꿈길을 걸어오네.
휴스턴에서 김훈묵(Winston H.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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